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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적에 도전한 노모히데오, 성인의 반열에 오르다!


성인(세인트)은 종교에서 신성시되는 인격자를 의미하며, 서양에는 3번의 기적을 이룬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종교인도 아니고 서양인도 아니지만 일본 야구에는 3번의 기적을 이룬 성인(세인트)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가 바로 노모히데오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그건 조작 아니면 기적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99%가 조작이고 1%가 기적이다. 노모히데오의 등장 자체가 아시아 야구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기적이었다.

노모히데오의 야구인생은 감동과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기적의 연속이었다. 즉 1%의 가능성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기적 - 혜성처럼 등장한 노모히데오


노모히데오는 고교 3학년때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면서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스카우트들은 외면했고 훗날 노모히데오가 말하기를,

"나는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일본에는 고교야구팀이 4천여개나 되지만, 이 중에서 90% 이상이 동호회 수준이기 때문에 노모히데오의 퍼펙트게임은 특별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진>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만 18세를 1개월 앞 둔 노모히데오의 신체조건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80년대 아시아 야구에서 그 보다 더 좋은 신체조건은 찾기 힘들다.

스카우트들이 노모히데오를 외면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세상에 장벽이 존재했던 냉전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아시아의 야구선수들은 세계화 이후의 선수들과는 성장과정이 조금 다르다.


세계화 이전 세대인 60년대 출생자들은 일찍 완성되었고, 정상급의 강속구를 던지게 될 강견은 아무리 늦어도 만 17세에는 잠재력이 드러났다. 세계화 이후 세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현(2013년) 기아 타이거즈 에이스 윤석민의 사례를 보면,


윤석민은 만 17세 이후에도 강견의 잠재력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관련하여 감독의 인터뷰 중에 주목할만한 내용이 보인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물론 대학가서 잘 할 수도 있지만 평범한 선수로 뛰다 사라지는게 아닌가"

야구선수와 일반인은 다르다. 특히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투수의 경우에 만 18세까지도 가능성이 안 보이면, 그건 안 된다는 강력한 신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만 18세부터는 빠른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런 윤석민이 만 17세 6개월째가 되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놀라웠던게 자고 나면 구속이 빨라졌습니다."


투수에게 만 17세까지가 왜 중요한가? 재생능력이 워낙 좋기 때문에 어떻게 될 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미국에서 음주 가능 연령이 가장 빠른 나이가 만 18세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재생능력이 좋을수록 부작용의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88년 노모히데오의 등장은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21세기 청소년 세대인 윤석민은 특이한 케이스지만, 80년대 청소년 세대인 노모히데오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월한 신체조건의 노모히데오는 빠른 성장이 끝난 이후에도 찌질한 공을 던졌고, 프로팀 스카우트들은 비관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관련하여 노모히데오는 사회인 야구팀 입단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그 당시의 노모는 "아. 나는 여기서 평생을 일하게 되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인생은 알 수 없다.


비루했던 노모히데오는 1988년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 사회인 야구를 평정했고 88올림픽에서는 아시아 정상급의 강력한 공을 던졌다. 당시의 상식에서 타고난 강견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150km가 넘는 스피드까지 기록했던 것이다. 늦어도 만 18세에는 145km에 육박하는 최고 스피드가 가능한 강견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꿈의 150km를 돌파했던 것이다.

<참고> 최동원, 박철순, 에가와 스구루의 최고 스피드


정치와 관련해서 이런 말이 있다. "놀라운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음모!"

아시아 야구에서 일명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최초로 사용된 시점은 언제일까?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제품이 최초로 사용되었는지는 알려져 있다. 신기술의 "3세대 스테로이드"이다.

삼성서울병원 스포츠 의학센터 박원하교수의 인터뷰에서 "3세대 스테로이드"의 등장 시점을 확인할 수 있다.





"벤 존슨이 올림픽 출전 1년 6개월전쯤에 3세대가 나왔습니다." 1987년초(2~3월)에 나왔다는 것이다.

아시아 야구사에서 1988년 이전에 노모히데오의 등장에 비교될만한 비슷한 사례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1986년까지도 가능성이 안 보이던 노모히데오는 1987년 이후에 신인류로 진화했고 1988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1세대, 2세대 제품은 왜 사용되지 않았을까?

88올림픽이 사실상 최초의 도핑테스트 올림픽인데,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자기들 끼리만 먹을 때는 검사도 안 하다가" (미국 야구에는 노모히데오와 비슷한 경우가 70년대부터 있었다는 뜻이다.)

80년대 중반에 냉전의 균형이 기울어지면서 공산권의 경이로운 약물 기술이 전세계에 전파되었는데, 3세대 제품에는 그 경이로운 기술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스테로이드 세계화는 아시아 스포츠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화시켰다.



두 번째 기적 - 선구자로 둔갑한 노모히데오


야구팬들이 약물 관련하여 사용하는 "약 빨고 던진다"는 정확하게 따지면 틀린 표현이다. 7~80년대 메이저리그에서 사용된 마약류 약물에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호르몬 계열의 약물은 다르다. 마약류 약물이 보톡스라면 호르몬 계열의 약물은 성형수술인 셈이다.

(호르몬 계열) 약물로 강견을 만든 이후에는 꾸준히 트레이닝만 하면 더 이상 약물 없이도 강견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유효기간이 있다.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 이후부터는 부상 또는 구위가 하락하는 등의 고비가 반복되면서 약물 사용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나중에는 비시즌 기간이 약물 보충 기간이 될 정도로 주기가 짧아진다(부작용의 가능성도 점점 높아진다).

관련하여 야구기록 안내자 김형준이 편집한 노모히데오 신격화 스토리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데뷔 후 첫 4년간 너무 많은 공을 던진 노모는, 1994년 마침내 어깨에 무리가 왔다. 여기에 1993년에 부임한 스즈키 게이시 감독은 입단 당시 약속을 깨고 노모의 투구폼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 300승을 달성한 스즈키 감독은 노모가 8월에 부상을 당하자 "이제 그는 끝났다"는 발언을 했다. ·········· 시즌 후 노모는 구단에 다년 계약을 요구했다. 하지만 구단은 거부했다.


"이제 그는 끝났다." 스즈키 감독만 단언한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노모는 구단에 다년 계약을 요구했지만 구단은 거부했다."

스즈키 감독의 발언과 구단의 조치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 이후의 두 번째 어깨부상은 구위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이 상식으로 통했다.

스테로이드 세계화 이전 세대에게는 불변의 진리였다.

1991년에도 어깨부상이 있었지만 경미한 부상이었고, 재생능력이 좋은 만 23세였으나, 두 번째 어깨부상은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의 심각한 부상, 즉 다시는 구위를 회복할 수 없다는 확실한 신호였기 때문이다.


선동열도 1992년에 어깨부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4월 11일 완투 이후에 어깨에 염증이 생겼고, 4월 25일 자진 강판한 이후의 등판일지를 보면 가관이 따로 없다. 경미한 부상임에도 공백기간이 2개월이 넘는다.


투수에게 어깨부상은 사형선고라는 말이 있다. 특히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 이후의 어깨부상은 회복한다 하더라도 구위 회복이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선동열이 무리를 했거나, 심각한 부상이었다면 선수생명은 끝났을 것이다.


브랜든 웹은 어깨부상으로 끝내 은퇴를 하게 된다(1992년 선동열과 동일한 나이때 부상). 3년간의 재활은 소용이 없었다.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 이후의 어깨부상은 일반 야구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구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러한 상식이 노모히데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관련하여 노모히데오 신격화 스토리를 보면,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던 10월 1일 경기에서, 노모는 4회 머리에 타구를 맞고 교체됐다. 두개골에 실금이 간 상황. 하지만 노모는 9일 경기에 자원 등판, 7.1이닝 동안 144개의 공을 던졌다. 그리고 13일 경기에서는 10이닝 완투를 하면서 182개를 던졌다. 노모는 17일에도 연장 10회까지 177개의 공을 뿌렸다.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9일 동안 3경기에 나서 503개의 공을 던진 것. 이는 스즈키 감독을 향한 메시지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보여준 마지막 투혼이자 작별인사였다.


8월에 어깨부상을 당한 노모히데오는 10월 1일 복귀하여, 즉 2개월도 안 되는 공백기간임에도 경이로운 투구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구에 머리를 맞고 두개골에 실금이 간 상태에서도 자원등판을 하는 투혼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20대 야구선수의 골밀도는 일반인과는 다르다. 두개골에 실금이 간 충격은 심각한 상태를 의미한다(대부분 수술로 이어진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추측이지만, 당시 노모히데오의 골밀도가 일시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 야구에는 노모히데오 등장 이후에 고교때 가능성이 안 보이던 선수가 고교 졸업후에 우월자로 둔갑하는 기적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기적은 단 한 번으로 끝난다.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이룬 이후에 기적을 이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양심도 있기 때문이다. 노모히데오의 두 번째 기적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모히데오는 멈출 수가 없었다. 타고난 천박함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저리그를 개척한 선구자로 둔갑했던 것이다!

<참고> 아시아 야구사 역대 최고 스테로이드맨 노모히데오



세 번째 기적 - 예수처럼 부활한 노모히데오


토미존 서저리가 투구 스피드를 증가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무려 10km 이상 증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인대는 스피드 증가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스피드 증가는 근육 수축 능력이 더 좋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피드 증가는 재활 프로그램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꿈치 뼈조각 제거 수술의 경우에도 재활 프로그램 이후에 스피드가 증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재활 프로그램 때문에 스피드가 증가하는 것이라면, 재활 프로그램을 적용한 트레이닝을 할 경우에는 더 빠르고 강력한 공을 던질 수도 있다는 것인가? 어째서 수술 이후에만 재활 프로그램 효과를 볼 수 있나? 스피드 증가는 (성장기때가 아니라면) 호르몬 치료를 병행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97시즌이 끝나고 10월에 팔꿈치 뼈조각 제거 수술을 받은 노모히데오는 98시즌에 노쇠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구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 된다. 결국 98시즌이 끝나고 일본 복귀설까지 흘러나오게 된다.

노모히데오가 부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세 번째 기적을 쓰지 않았다면 약물의혹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노모히데오는 또 다시 기적을 썼던 것이다. 사기극의 실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기적을 반복했던 것이다.

2003년(만 35세)까지도 최고 스피드 150km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사대주의 일빠들은 열광했다. 아시아 야구사에서 전무했던 위대한 신인류와 동시대를 함께 했다면서 감격했고, 노모히데오를 배출한 大일본제국을 경외했다.


노모히데오는 2003년까지 전성기를 방불케하는 강력한 공을 던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2004년부터 구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다. 그것이 기적의 마지막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7년 스테로이드 세계화 이후에 1988년에 혜성처럼 등장했고, 스테로이드가 철퇴를 맞은 2003년에 드라마틱했던 야구인생의 막을 내렸다. 노모히데오가 가장 선호했다는 번호 16처럼 무려 16년동안 기적의 야구인생을 연출했던 것이다.


2003년 배리본즈의 법정증언은 약쟁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고, 신개념 조작 기법이 완성될 때까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쌓아놓은 것이 많았던 노모히데오는 더 이상의 기적은 시도하지 않았다.

비루했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노모히데오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한국 언론도 불굴의 투지라며 신격화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진정한 영웅의 작렬한 최후처럼 포장해 주었다. 성장기때 찌질이는 영원히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야구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이없게도 노모히데오를 (작렬한 최후였다는 의미로) 사쿠마 쓰토무에 비유하는 신격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 사쿠마 쓰토무는 이런 인물 -

1910년 봄, 일본에서 73톤에 불과하지만 최신형 군함 한척이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함정의 이름은 제 6잠수정. 미국에서 다섯척을 직도입한 홀랜드급 잠수정을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한 함정이다. 미국제 보다 성능이 떨어졌어도 첫 국산 잠수정이었기에 일본은 우수인력을 뽑아 시험 항해에 나섰다. 기대와 달리 두번째 잠항훈련에서 6호정은 히로시마만의 16m 해저에 가라앉고 말았다.

침몰 이튿날 인양된 6호정은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14명의 승조원들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기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장은 사령탑에, 기관장교는 전동기 옆에, 조타병은 조타석에서 죽었다. 영국 해군에서 동형의 잠수정이 침몰했을 때 먼저 탈출하려고 시신이 출입구에 엉겨붙은 채 발견되고 심지어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난투극까지 일어났던 전례와는 완전히 다른 일본 군인들의 죽음에 세계가 전율했다.

일각에서 제기한 조작설도 사쿠마 쓰토무 대위의 유서 하나로 자취를 감췄다. 사고발생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두시간 동안 그는 침몰 원인과 대응을 상황별로 기록했다. 975개자(字)의 유언 중 가장 감명을 준 대목은 일본 국왕에 대한 탄원. '폐하의 배를 침몰시키고 부하를 죽게 한 소관의 죄는 씻을 길이 없으나 승조원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나이다. 그들의 유족이 곤궁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정치와 관련해서 이런 말이 있다. "놀라운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음모!"

단 한 번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반복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놀라운 우연은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NPB 스카우트들이 1986년에 측정한 고교 3학년생 노모히데오의 스피드만 공개되면 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

역사왜곡을 밥 먹듯이 하는 일본이라도 노모히데오가 고교 3학년때 최고 145km까지 던졌다는 날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려 145km를 던지는 우월한 신체조건의 고교생 투수를 복수의 프로팀 스카우트들이 외면한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노모히데오의 사회인 야구팀 입단에 대해 일본문화연구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고교를 졸업할 시기가 되자 프로구단에서 손짓을 해왔다. 그러나 노모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프로로 뛰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그는 아마추어 구단을 택했다."


박찬호가 사대주의 일빠들에게 먹튀, 얌체 구원승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노모히데오의 메이저리그 최다승 기록을 깨려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박찬호도 약물의혹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노모히데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참고> 박찬호 도핑테스트 양성반응과 구로다 히로키의 진화


노모히데오는 최고의 야구선수를 꿈 꾼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3번의 기적을 연출했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우연이 반복되었다. 인간으로서 이해해줄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난 추태였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어쩌면 노모히데오가 추구한 목표는 성인(세인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의 기적에 도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세인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노모히데오 이름으로~ 노모히데오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노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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