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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특급 박찬호와 토네이도 개척자 노모히데오(야무영웅)


북미 선진국은 70년대부터 미디어 시대가 시작되었고, 일본도 70년대 특정 시점부터는 미디어 시대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80년대 일본에서 유학했던 사람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은 거리에서 미인을 본다는 게 하늘에 별 따기다. 하지만 한국은 거리에서도 미인을 볼 수 있다."

일본은 미디어 시대가 일찍 시작되었기 때문에 왠만한 미인은 TV에서만 볼 수 있었던 반면에 성형기술이 발달한 이후에 미디어 시대가 시작된 한국은 거리에서도 미인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미디어 시대는 성형기술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극소수의 미인들이 독점하던 시대를 종식시킨 것이다.


90년대 어떤 여자 연예인이 등장했는데,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인기가 절정에 오르자 잡다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성형전 사진이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못 생긴 다른 여자들도 성형을 하면 그 연예인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성형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연예인이 성형하지 않았어도 타인이 보기에 성공적인 인생이 되었을까? 이 또한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사실은 성공한 성형 미인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도록 말장난을 한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이 문제점을 다룬 장면이 나온다. 기계와 싸우는 지긋지긋한 현실에 지친 나머지 동료들을 배신했고, 그 대가로 돈 많은 부자에 미인들을 거느리는 가상 인생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재색"을 모두 갖추었다는 표현이 있다. 재능과 미모를 모두 갖추었다는 뜻이다.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엔터테이너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다. 혐오스러운 외모 때문이었다. 재는 뛰어났지만 색이 부족했던 것이다. 재는 열정과 노력으로 완성시킬 수 있지만 색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미묘해서 약간의 수정만으로도 혐오스러운 얼굴을 매력적인 얼굴로 둔갑시킬 수 있는데, 과학의 발달은 그것을 구현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포츠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야구에서 최고 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완성도와 구위를 갖추어야 한다. 완성도는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구위, 즉 파워는 한계가 있다. 일명 약물은 후천적으로 파워를 갖출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삼국지의 유명한 일화를 통해 약물로 파워를 갖추는 과정을 알아보자.

유비는 나이 50이 다 되도록 이룬 것이 없었다. 전쟁에서는 필패였고 근거지도 없었다.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하던 중, 후계자 다툼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표의 처남 채모는 연회에서 유비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비는 도망을 갔으나 어떤 강 앞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급한 마음에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치자 말이 갑자기 뛰어 올라 계곡을 뛰어넘게 된다.

유비가 뛰어넘은 강의 계곡이 바로 단계이며, 유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원직을 만나 처음으로 승리를 경험했고, 이후에 제갈공명을 만나면서 마침내 촉나라 황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유비, 단계에 오르다" 일화이다.


일명 약물은 단계에 오르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성형과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유비가 죽음 직전에 단계를 뛰어넘은 것처럼 강도 높은 트레이닝이 병행되어야 한다.

약물은 무조건 먹기만 한다고 파워를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형과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성형기술의 발달로 미인이 80년대에 비해 90년대는 10배, 21세기에는 20배 이상 증가했다면 강속구 투수는 2배, 3배 정도가 증가했을 뿐이다.

하지만 약물은 양민으로 태어난 소시민에게도 희망을 주었다. (미성년자때 혹사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천재보다 앞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양민으로 태어난 소시민은 과학의 축복으로 마침내 개척자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시대 초창기에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아마도 포르노 사이트일 것이다. 88올림픽 이후에 본격적으로 미디어 시대가 시작되면서 가장 심각했던 문제도 포르노 비디오였다.

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하는데, 청소년의 고민 상담을 해 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고 인기 개그맨이 진행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밤 시간에 청소년의 고민을 전문가가 상담해주는 프로그램이었고, 고교 1학생이 전화를 걸었는데,

선생님에게 들은 말에, "너희들은 물건도 어른처럼 다 컸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들과 포르노를 봤는데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는 것이었다. 고교 1학년생 입장에서 보통 걱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동물 학자들, 예를 들어 사자 전문가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길래 전문가라고 하는 것일까?

사자 일생의 패턴을 알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아프리카 사자와 인도 사자는 패턴이 조금 다르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짐승의 일생은 환경에 따른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사람도 짐승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리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숫사자의 생식기가 완성되는 시점이 되면 어미 암사자가 내쫓는다. 무리를 이끄는 아비 숫사자가 물어 죽이기 때문이다.

쫓겨난 청소년 숫사자들은 보통 2마리가 쌍을 이루어 생사를 건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숫사자들이 죽으며, 여정을 무사히 마친, 즉 내성과 경험을 축적한 어른 숫사자들만이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야생의 맹수들 세계를 인간 세상에 옮겨놓은 것이 바로 스포츠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분야들 중에서 스포츠만큼 원초적인 분야가 없다. 그 옛날 낭만파 주먹들의 패턴도 맹수들 세계와 동일하다. 생식기가 완성되는 시기에 원초적인 잠재력이 드러난다. 빠르면 만 12세부터, 아무리 늦어도 만 17세부터는 잠재력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만 18세부터는 경험과 내성을 축적하게 된다.


이것을 야구의 투수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박찬호처럼 만 12세때 강속구 투수의 자질이 드러나는 천재형 강견이 있고, 선동열처럼 만 17세때 강속구 투수의 자질이 드러나는 대기만성형 강견이 있다(선동열의 실제 생년은 1962년).

결론적으로 만 12 ~ 17세 사이에 강견의 잠재력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패턴이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90년대 들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조작된 음식이 대량 유통되면서 기존의 패턴이 바뀌게 되는데,

(일본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에 비해 조금 더 빠를 수도 있지만) 대략적으로 1980년 이전 출생자와 이후 출생자의 패턴은 다르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 만 15세 전후에 생식기가 완성되지만 신체의 다른 부위는 만 17세까지도 성장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만 18세 전에는 왠만하면 음주를 해서는 안 된다. 부작용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스테로이드는 훨씬 위험하다. 중남미 출신들, 그리고 미국 히스패닉 이민자들은 선수층 대비 강속구 투수와 슬러거들이 비정상적으로 배출되고 있는데, 어린 나이때부터 금지약물을 먹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난한 선수들이고, 인디오 문화 영향 때문인지 대가족 문화에서 빠른 성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장기에 조작된 음식을 먹지 않았을 1980년 이전 출생자(투수)들은 만 12 ~ 17세때 강견의 자질이 드러나며, 빠른 성장이 완료된 만 18세 이후에 강견이 되었다면 약물 복용을 의심해야 한다.

공산권의 경이로운 약물기술이 전파되기 전에는 강속구 투수들이 극소수였다. 성형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미인들이 극소수였던 원리와 동일하다. 조작된 음식이 대량 유통된 90년대 이후에도 강속구 투수들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의 축복은 강속구 투수들을 증가시켰지만 부작용도 컸다. 조작된 음식과 과학의 축복은 강속구 투수들을 증가시켰지만 내성을 약화시켰고 내구력을 형편없게 떨어뜨리면서 현대 야구의 투수들 완성도가 대부분 저질인 원인이 되었다.

이를 인터넷 양아치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타자들 수준이 높아져서 투수들 내구력이 떨어져 보이는 것이다."


KBO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견의 잠재력이 있는 고교야구 투수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완성도 높은 투수들에게만 관심을 가졌으나 21세기부터는 두메산골 출신이 아닌 이상 놓치는 경우가 사실상 없다. 완성도는 노력으로 갖출 수 있지만 강속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약 많이 먹고 트레이닝 열심히 해서 강견이 되라고 독려할 수는 없으니깐!

그렇다면 KBO보다 훨씬 오랜 역사의, 그리고 70년대 이미 북중미 용병들이 있었던 NPB는 어땠을까?

1976년 세계야구선수권은 최초의 세계 메이저 야구대회이다. 그리고 1984년 올림픽에서 야구가 시범 경기로 채택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이 참가한 세계 메이저 야구대회는 다음과 같다.

1976년 세계야구선수권
1978년 세계야구선수권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
1981년 대륙간컵 (1979년까지는 주최국의 초청 형식이었기 때문에 메이저 대회로 보기 힘들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1984년 LA올림픽
1984년 세계야구선수권

1984년까지 세계 메이저 야구대회에서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은 기교파 일색이었고, 1985 ~ 1987년 대회는 확인을 못했지만 1987년에 있었던 대만 초청 대회에서도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은 기교파 일색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과 관련하여 이 말은 상식이었다. "강속구는 아니지만 변화구가 예리하고 제구력이 좋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일본인들은 꼼꼼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야구는 국기이며 70년대에 이미 NPB 역사가 3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강속구 투수의 잠재력이 있는 고교야구 투수들을 놓칠 수가 없다. 하지만 강속구 투수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한국인이든 대만인이든, 강속구 투수는 아무리 완성도가 형편없어도 스카웃을 시도했다. 계형철은 30세에 투구에 눈을 떳을 정도로 완성도가 바닥이었는데, 당시에 아시아 정상급 수준의 강속구를 던졌다고 한다.

70년대 이미 NPB가 선진화된 리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66년에도 이 정도였다.


"만 18세"였던 이원국이 NPB 에이스급 스피드였다는, 그리고 NPB는 강속구 투수 스카웃에 국적과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은 기교파 일색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학야구에 강속구 투수가 존재한 적이 있었으나, 대표팀에는 선발되지 않았다. 본인이 프로를 기피한 에가와 스구루가 있었다.

<참고> 에가와가 최동원에 비교될 수 있는 레벨인가?


아시아 야구에 언제부터 금지약물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패턴을 분석하여 추정하는 방법이 유일하지만, 그 방법은 의외로 정확하다. 왜냐하면 인간도 짐승이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른 패턴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패턴의 범위에는 이런 것이 있다. 만 26세 이후의 투수들, 특히 30세 전후에 팔꿈치에 이상이 생기면 스포츠 의학 전문의들은 왠만하면 재활을 권유하는데, 재생 능력이 떨어지는 만 26세부터는 수술 이후에 다시 구위를 회복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투수들에서 관련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성장기 때는 구위 회복 가능성이 대단히 높지만, 만 26세 이후의 투수들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패턴을 벗어나는 투수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패턴에 변화가 일어난 최초 시점 당시에는 인지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패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역추적하여 대략적인 최초 시점을 파악할 수 있다. 88올림픽 당시에는 몰랐으나 시간이 지난 이후에 경악할만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만 19세"인 애보트가 1987년부터 88올림픽 미국 대표팀 에이스로 예상되었고, 주니치의 신인 투수 곤도(만 18세)가 데뷰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으며 초구 스피드가 144km였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87년 8월까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회인 야구의 노모히데오는 88올림픽에서 150km가 넘는 최고 스피드를 기록했으며, 구위도 아시아 정상급이었다. 경악할만한 사건이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 20세"때 대회 최고 스피드가 150km를 넘었고, 아시아 정상급 구위였다는 것은 고교 시절에도 정상급이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투수가 어떻게 사회인 야구 소속일 수 있나? 노모히데오는 두메산골 출신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NPB에서 고교 3학년(만 18세) 노모히데오의 잠재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만 19세" 이후에 파워가 경이로운 수준으로 발전해야만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과거 아시아 야구에는 그런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강속구 투수들이 극소수였기 때문에 뒤늦게라도 강속구 투수의 자질을 보이면 투수로 전향시키던 시절이었고, 이는 한국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지역마다 음주 가능 연령이 조금씩 다른데, 가장 빠른 나이가 만 18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만 18세부터는 거의 다 성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만 20세까지도 성장 속도가 빠른 경우가 있지만, 그건 일반인들만 해당된다.

실제로 군대에서 가장 전투력이 우수한 계급이 상병이라고 하는데, 정상적으로 입대한 경우에는 만 21세 전후의 나이에 해당된다. 현대인들은 노동의 비중이 적고, 일반인들은 운동선수들에 비해 퇴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뿐이다.

투수의 경우에는 가장 성장 속도가 빠른 만 12 ~ 17세 사이에 강견의 잠재력이 드러나며, 과거 아시아 야구에서 이러한 패턴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나이때 노모히데오는 야구 선수가 아니었나? 이 뿐만이 아니다. 만 26세때 어깨부상에서도 비정상적인 패턴이 발견된다. 관련하여 야구기록 안내자 김형준이 편집한 노모히데오 신격화 스토리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데뷔 후 첫 4년간 너무 많은 공을 던진 노모는, 1994년 마침내 어깨에 무리가 왔다. 여기에 1993년에 부임한 스즈키 게이시 감독은 입단 당시 약속을 깨고 노모의 투구폼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 300승을 달성한 스즈키 감독은 노모가 8월에 부상을 당하자 "이제 그는 끝났다"는 발언을 했다.


1994년은 노모히데오가 만 26세였고, 혹사에 의한 부상이라면 구위 회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스즈키 감독의 발언은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이었다. 과학의 축복 이전 세대에게는 불변의 진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모히데오는 불과 몇 개월만에 부상에서 회복되었고, 타구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에 실금이 간 상태에서도 자원 등판하는 투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다! (뼈 밀도가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그게 가능할까?)

어쨌거나 20세기 아시아 야구사에 노모히데오처럼 혜성처럼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 세 가지가 전부다!


첫째, NPB가 부실한 리그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

노모히데오 등장 이전의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은 완성도 높은 기교파 일색이었고 이원국, 계형철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NPB는 강속구 투수 스카웃에 국적을 가리지 않았으며, 복수의 프로팀 스카우트들이 고교 3학년생 노모히데오를 관찰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노모히데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둘째, 포크볼은 스테로이드를 불렀다!

야구기록 안내자 김형준이 편집한 노모히데오 신격화 스토리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장무기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후 구양신공을 배운 것처럼, 노모는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간 신일본제철에서 결정적인 '비공'을 손에 넣었다. 감독이 대수롭지 않게 알려준 포크볼 그립이었다. 이 때부터 노모는 포크볼만 파고 또 팠다. 그리고 "포크볼이 완성되자, 사회인야구가 감당할 수 없는 투수"가 됐다. 노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일본 전역에 확실하게 알렸다.

포크볼을 알려준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다.

신일본제철 에이스인 나카가와란 투수에게 포크볼을 배워, 오늘날 자신을 있게 만든 포크볼을 연마해 갔다. "빠른 직구에 낙차 큰 포크볼"을 가미한 그는 승승장구하며 일약 사회인 야구의 최고 투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두 주장의 공통점은 프로입단에 실패한 후 사회인 야구팀에서 포크볼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모히데오가 포크볼에 익숙해졌을 시점은 언제일까? 일반적인 야구 상식을 적용할 수밖에 없는데, 고교 졸업후인 2월에 포크볼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고, 노모히데오가 포크볼에 대단히 능숙했다는 점에서 아무리 늦어도 여름쯤에는 포크볼에 익숙해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다.

노모히데오는 고교 졸업때까지 찌질한 공을 던졌고, 그 때문에 복수의 프로팀으로부터 낙제점을 받았으며, 그 결과 영원히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만 19세에 익힌 포크볼은 큰 도움이 안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체인지업(포크볼)은 강력한 직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특별해도 위력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노모히데오는 돌파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차별화된 포크볼을 완성시켰지만 찌질한 파워가 발목을 잡았고, 그 걸림돌은 노모히데오가 선구자의 길을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공산권의 경이로운 약물기술이 전세계에 퍼지기 시작한 90년대 이후에 체인지업의 비중이 높아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투수가 완성도를 갖추는 과정은 고난의 여정이지만 과학은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과학은 구위와 스피드를 괄목할만하게 향상시켰고 세계 야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경쟁력있는 "포심+체인지업"이면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투수, 타자 할 것 없이 한 방 야구가 대세가 되면서 그야말로 저질 야구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1988년 만 20세의 노모히데오는 사회인 야구를 평정하는데, 강력한 직구와 포크볼이 원동력이었다. 1987년 여름까지도 찌질했던 구위가 1년도 지나지 않아 아시아 정상급 구위가 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무조건 약물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면 확실하다. 인간은 짐승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두 번째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지만 미천한 일빠들에게 노모히데오는 신성한 존재이므로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세째, 노모히데오는 운명적인 영웅이었다!

세 번째 가능성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노모히데오는 "만 19세"부터 시상하부와 뇌하수체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과다 호르몬 분비로 인해 일반적인 우월자들과는 달리 2차 성장을 하면서 강견의 잠재력이 뒤늦게 드러났던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아주 간단하다.

생식기가 2차 성장을 했다는 뜻이다. 생식기가 완성되는 만 15세 전후가 중요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체 성장이 가장 빠른 나이때 인간의 원초적인 잠재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찌질이었던 인간이 빠른 성장이 끝난 이후에 경이로운 잠재력이 드러났다는 것은 생식기가 2차 성장을, 그것도 일반적인 우월자들의 성장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성장을 해야만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노모히데오는 하늘이 낸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호모좆데오였던 것이다!


누구도 정답은 알 수 없지만, 둘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스테로이드 또는 경이로운 2차 성장 외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은 용가리 통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짐승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NPB의 변태성을 지적하는 내용 중에 이런게 있었다(마쓰자카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않았을 때이다).

"어떻게 마쓰자카를 노모히데오보다 더 높게 평가하나?" 사실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주제도 모르는 일그러진 영웅의 "소시민은 도전자를 비웃는다"는 희대의 개소리를 마쓰자카가 깨 주기를 바랬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득이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인들의 운동능력이 저질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노모히데오의 과거는 비루하지만, 아시아 야구의 흐름을 바꾼 선구자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냉전의 균형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80년대 중반에 다시 재개된 미일 올스타전에서 NPB 올스타는 비참한 패배를 당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7차전까지 NPB 올스타는 21득점(평균 3득점), 51안타(평균 7안타)를 기록했다.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국제경기였다는 점에서 결코 적지 않은 안타와 득점이었다(매 경기 7안타 3득점).

문제는 71안타, 19홈런을 허용한 투수력과 고작 1홈런을 기록한 장타력에 있었다. 파워 차이가 상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NPB 에이스들이 메이저리그 4선발 조차도 꿈이었고 땜방 5선발 견적이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었으니 답이 안 나왔다. NPB 최초의 현역 메이저리거 용병이었던 밥 호너는 1987년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는 빠른 볼과 느린 볼이 있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에는 느린 볼과 더 느린 볼이 있다."

이런 흐름을 바꿔 놓은 선구자가 바로 노모히데오이다. 1988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일본인들도 먹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노모히데오가 이끈 NPB 올스타는 4년전의 수모를 그대로 갚아주었던 것이다!

1990년에 수모를 당한 미국은 냉전시대 마지막 엘리트 스포츠 세대들을 주축으로 엔트리를 구성하여 1992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NPB 올스타를 짓밟아 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20세기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저력이었다.


1993년부터 세계화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메이저리그도 변신을 시도한다. "쇼 비즈니즈 엔터테인먼트 서커스 리그"로의 변신(이기는 야구가 아닌 멋있는 야구)에 성공하면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잘 먹는 사람이 튼튼하다는 진리를 증명했던 것이다.

1995년 다저스에 입단한 노모히데오는 6월 3일 메츠전에서 브렛 세이버하겐을 상대로 8이닝 2안타 1실점 승리를 시작으로 7연승을 질주하면서 토네이도 열풍을 일으켰으며, 그 해 28경기에 등판하여 13승 6패로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노모히데오는 동양인도 먹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서양인을 이길 수 있다는, 그리고 아시아 야구도 얼마든지 스케일 큰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개척자였다! 90년대 아시아 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흐름을 바꾼 선구자였다!

<참고> 박찬호 전성기 메이저리그 커리어는 약물시대의 위대한 업적?


어쩌면 과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도 천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진정 우월한 종자라 생각하여 최고라고 믿었다면, 번지수가 틀렸다! 노력과 열정, 그리고 약발을 인정하여 최고라고 생각했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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