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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에게 사용되는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는 정당한가? 반론


선동열에게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가 최초로 사용된 시점은 86년이었다.

86년 - 39경기 24승 6패 6세이브 262.2이닝 (0.99)


24승 262.2이닝 0.99 방어율 때문에 선동열이 국보급 투수라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위대한 기록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불과 1개월만에 의심을 받게 된다. 그 시절 야구팬들이 아무리 무지했어도 최소한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는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6년 9월에는 아시안게임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프로야구 정규시즌은 조기에 종료되었다. 선동열은 9월 13일 청용전(7이닝 구원승)을 마지막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10월 19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등판하는데,

무려 35일간의 넉넉한 휴식에도 불구하고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한다. 1차전에서는 9이닝 3실점을 했고, 4차전에서는 6이닝 2실점을 하면서 패전 직전까지 갔으나 팀 타선의 도움으로 겨우 패전을 면하게 된다.

상대팀이었던 삼성은 선동열이 선발 등판한 경기(1, 4차전)를 다 잡아 놓고도 연장전에서 역전패를 당하는데, KBO가 새롭게 적용한 몰상식한 제도 때문에 종합승률 1위를 했음에도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5차전 내내 두산과 피말리는 접전을 벌였고, 단 1일 휴식후에 시작된 한국시리즈에서 누적된 피로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다 잡은 경기를 놓쳤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진짜 실력은 포스트시즌 기록


한국시리즈 이후에 84년 최동원보다 떨어지는게 아니냐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많은 야구팬들이 그러한 평가에 주목하게 된다. 80년대 가장 치열했던 시즌이 84년이었고, 더구나 84년 롯데는 막장팀이었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막장팀 롯데에서 27승을 기록한 반면 선동열은 삼성과 함께 최강팀이었던 86년 해태에서 24승을 기록했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4승으로 막장팀 롯데를 우승시켰다는 점에서 야구 이해도가 떨어졌던 당시 야구팬들도 투수의 여러 기록들 중에서 방어율이 진정 신뢰할만한 기록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방어율이 가상수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구는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이고, 가상수치(방어율)보다 실적(이닝+승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동열에게 87시즌은 정말 중요했다.

87년 - 31경기 14승 2패 6세이브 162이닝 (0.89)


87년 기록을 대충 보면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세부 내용을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던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가, 더구나 이닝이터 평균이 200이닝이 넘었던 시절에 고작 162이닝을 던졌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등판일지와 구원승 내역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록이었다.


14승 중에 무려 9승이 구원승이었다. 그리고 8, 9월에 구원승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4월에 7경기, 5월에 4경기, 6월에 1경기, 7월에 3경기, 8월에 4경기, 그리고 9월 2일부터 10월 2일까지 시즌 후반기에만 무려 12경기에 등판하여 (여름내내 푹 쉬고 9월부터) 지쳐있는 타자들을 상대해서 그럴듯한 기록만을 남긴 시즌이 87년이었다.

87년 등판일지가 6월부터 한심해진 이유는,  5월 16일에 그 유명했던 최동원과의 연장 15회 마지막 맞대결 이후에 뻗었기 때문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최동원과의 맞대결 관련 내용이 파렴치한 선빠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 최동원, 선동열 맞대결이 원래 4차전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은 3차전(10월 10일) 1:1에서 8회 1사 1루에 구원 등판하여 1볼넷과 1안타를 허용하고 강판당했고(0이닝 2자책점), 한국시리즈에서는 2차전(10월 22일)에 등판하여 1.2이닝 세이브를 기록한 것이 87년 포스트시즌 기록의 전부였다.

시즌 막판에 그럴듯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 무리한 등판을 했고,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던 10월 3일 빙그레전에서 5이닝을 던진 이후에 6일간의 휴식은 선동열에게 턱없이 부족한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87년 포스트시즌 이후에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는 사실상 폐기된다. 하지만 88년에도 해태팬들과 언론의 선동열 찬양에는 변함이 없었다. (87년 대통령선거 이후에) 해태팬들에게 선동열은 이유 없는 희망이었고, 따라서 언론에게 선동열은 전략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88년 - 31경기 16승 5패 10세이브 178.1이닝 (1.21)


88년부터 해태는 독보적인 강팀이 되었고, 그래서 선동열의 88년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독보적인 강팀에서도 여전히 선발 10승이 불가능했고 200이닝(80년대 이닝이터 평균) 투구가 불가능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긴 있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완벽한 피칭으로 최초의 선발승을 기록했던 것이다(7.1이닝 무실점).

9월에는 88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즌이 조기에 종료되었고, 선동열은 8월 25일 두산전(6이닝 구원승) 이후에 10월 19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등판했다. 무려 54일간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선동열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선동열이 해태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6년동안(86 ~ 91년) 무려 8번의 포스트시즌 시리즈에서 2번이상 선발 등판한 시리즈는 86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했고(1, 4차전), 완벽한 피칭으로 선발승을 기록한 시리즈는 88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했다. 무려 1개월 이상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의 야구팬들이 믿기 힘들겠지만, 선동열은 80년대 KBO에서도 4일 휴식 로테이션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88년은 선동열이 기껏해야 15승 투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시즌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승수가 중요한 이유는,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던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당연한 실적이었지만, 하위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추세(최강팀 에이스가 이닝이터 평균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는 15승 투수)가 계속되었다면 언론에서 아무리 뻥튀기를 해도 현재의 야구팬들은 선동열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84년부터 87년까지 최강팀이었던 삼성의 에이스 김시진의 기록을 보더라도,

(84년) 215이닝 19승 - (85년) 269.2이닝 25승 - (86년) 196.2이닝 16승 - (87년) 193.1이닝 23승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당연한 실적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선동열은 86년 반짝 활약 이후에 88년까지 평범한 에이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89년에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

89년 - 36경기 21승 3패 8세이브 169이닝 (1.17)


169이닝을 던지고 어떻게 21승이 가능했단 말인가? 일단 구원승 내역부터 보자.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89년에도 선동열은 여전히 선발 10승이 불가능한 투수였지만, 구원승의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20승 투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강철이 해태에 입단하면서 선동열에게 구원승의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선동열 - 36경기 21승 3패 8세이브 169.0이닝 (1.17)
이강철 - 36경기 15승 8패 5세이브 195.1이닝 (3.23)



이렇게 되면 도대체 누가 에이스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 진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선동열에게 절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스포츠 언론에 흥미로운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 유명한 "선동열은 애기야 애기"


[프로야구 주간방담] 1990년 3월 14일 스포츠서울

하와이에 전훈중인 쌍방울은 어린이 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탄 것과 같은 짜릿한 추억을 안게 됐습니다. 지난 6일 하와이 대학과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동국대 감독 시절 미국 대학팀들과 게임을 해 보았던 김인식 감독은 "그까짓 단일대학 쯤이야..." 했는데 엉뚱하게도 뉴욕 메츠의 선발 투수 시드 페르난데스가 선발로 올라온 겁니다. 페르난데스라면 지난해 14승 4패로 팀내 최고 성적을 올렸던 투수로 마침 미 프로야구가 '직장폐쇄'중이어서 모교에서 훈련중이었습니다. 결과는 3회까지 무안타 5삼진. 우선 덩치(185cm 104kg)에 놀라고 스피드에 놀란 김감독은 "선동열은 거기에 비하면 애기야 애기"라고 혀를 내두릅디다.


그렇다면 선동열은 90시즌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90년 - 35경기 22승 6패 4세이브 190.1이닝 (1.13)


이닝이터 평균 이닝수에 근접하는 변화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승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닝수만 늘어났을 뿐이지 세부내역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로테이션이었다. 컨디션이 좋을 때만 등판하다 보니 로테이션을 지킬 수가 없었고, 구원승 비중을 줄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에이스들의 구원승 비중이 높은 이유는, 선수층이 부실했기 때문에 에이스들이 불규칙적인 등판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정규시즌 경기수에 비해 출전 경기수와 이닝수, 그리고 구원승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사를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최강팀 에이스였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만 등판했으니 이닝수는 미달일 수밖에 없었고, 구원승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발승 - 이닝수 - 방어율]이 기형적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동열 - 35경기 22승  6패  4세이브 190.1이닝 (1.13)
이강철 - 44경기 16승 10패 5세이브 220.2이닝 (3.14)



이강철과의 기록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89, 90시즌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선동열이 아니었다. 당연히 언론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태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이강철!" 이에 자극을 받은 선동열은 91년에 진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91년 - 35경기 19승 4패 6세이브 203이닝 (1.55)


선동열 커리어에서 가장 에이스다웠던 시즌은 91년이 아닌가 싶다. 선발승이 15승이었고 이닝이터 평균 이닝을 소화하면서 방어율도 훌륭했다. 91년은 선동열 커리어에서 가장 정상적인 기록이 만들어진 시즌이었다.


사실 선동열의 86년 기록도 문제가 많았다. 부실한 선수층에서 7구단(빙그레)이 창단되면서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고, 전/후기리그 방식의 경기일정은 강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각 리그 후반(6, 9월)에는 포스트시즌 진출 경쟁에서 탈락한 팀들의 경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상위팀 투수들은 비교적 쉽게 승수를 올릴 수 있었고, 기록 관리에서도 월등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86년 선동열의 3연속 완봉승 기록도 9월에 경쟁에서 탈락한 팀을 상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하위팀 투수들은 기록에서도 말도 못하게 손해를 보았다.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방어율 관리는 꿈도 못 꾸었다.

<참고> 1986/87년의 특급 에이스 선동열


만약 선동열이 에이스로 활약한 6년동안(86 ~ 91년) 선발승 15승 이상, 200이닝 이상 투구, 1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유지했다면 누구도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동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선동열은 이강철이 해태에 입단하기 전까지 최강팀에서 구원승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15승 투수에 불과했고 이닝수는 미달이었다. 이강철 덕분에 일시적으로 20승 투수로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2시즌(90~91년) 연속 무리한(?) 투구를 하면서 선발투수 생명도 끝나게 된다.

선동열이 96년에 NPB에 진출해서 고전했던 이유는, NPB 수준이 월등히 높아서 KBO 역대 최고 투수가 고전한 것이 아니었다. 선동열은 KBO 역대 최고 투수도 아니었고, 최강팀에서 방어율에만 집착하는 몰상식한 야구만 하다 반대의 환경에서 실체가 드러난 것 뿐이었다.




[ 주간야구 88년 9월 14일(수) 발행 ] 선동열(만 25세) 인터뷰 중에서



그리고 선동열이 있었기 때문에 해태가 우승을 많이 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잘못 되었다. 선동열이 해태 우승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에이스로 활약한 기간동안(86 ~ 9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기여도는 미미한 수준이었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있어서도 86년을 제외하면 비중있게 기여한 시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선동열이 NPB에 진출한 이후에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이종범은 해태를 2년 연속(96~97년) 우승으로 이끌면서 선동열의 해태가 아니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선동열 없이도 해태는 얼마든지 강팀이었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아버지의 MBC 인터뷰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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