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habilitation Facility

gminhee.egloos.com

포토로그



슈우트(투심, 싱커)의 달인이었던 1984년의 최동원 컬럼


현재의 야구팬들이 알고 있는 최동원은 강속구+커브 조합의 단조로운 볼 배합을 했던 투수로 알려져 있으나 그건 사실과 다르다. 선동열이 부각된 86년 이후의 최동원만을 기억하기 때문인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핵심이기도 한 두 번째 이유는 80년대 국내 전문가들의 야구 지식이 수준 미달이었고 최동원의 슈우트가 국내의 다른 투수들의 직구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에 펼쳐진 81년 실업야구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불가사의한 이닝을 소화하고 어깨부상을 당한다(7일동안 42이닝). 이후에 82년 최고 구속이 140km도 안 나왔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많은 야구인들이 최동원의 시대는 끝났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롯데에 입단한 83년에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했으나 전성기 시절의 강력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망스런 기록을 남겼고 소속팀 롯데는 82년(0.388)에 이어 83년(0.420)에도 막장팀의 위치를 고수하게 된다.

83년 - 38경기 9승 16패 4세이브 16완투 208이닝 (2.89)


84년 롯데에 임호균이 가세했고, 전기리그에서만 최동원이 9승을 올리면서 83년 1년동안 거둔 승수를 반 시즌에 거두었으나 그것만으로 막장팀 롯데의 우승을 기대한다는 것은 꿈 같은 얘기였다(84년 전기리그 4위, 승률 - 0.429).

그런데 올스타전에서 최동원은 부활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3이닝을 투구하면서 던진 직구의 대부분을 슈우트로 구사하면서 전성기 시절의 투구 패턴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슈우트를 활용하여 적은 투구수로 조기에 범타를 유도하거나, 유리한 볼 카운트를 만든 이후에 145km가 넘는 높은 공으로 헛스윙 또는 평범한 플라이를 유도하는 볼 배합 패턴은 최동원이 부활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싱커 형태의 바깥쪽 슈우트로 땅볼(파울)을 유도하는 투구 -




- 몸쪽으로 파고드는 슈우트로 범타(파울)를 유도하는 투구 -




- 싱커 형태의 몸쪽 낮은 슈우트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투구 -


8~90년대 KBO의 스트라이크존은 상-하 폭이 좁고 높았기 때문에 낮게 떨어지는 구질은 강점이 없었다.
아래에 있는 최동원의 커브 영상은 현재 사용되는 S존 시스템에서는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했을 것이다.







최동원은 78년부터 선진 야구의 구질과 볼 배합 패턴을 스스로 터득했으며 80년부터는 슈우트를 비롯하여 낙차 큰 커브, 그리고 메이저리그 평균 이상의 브레이킹볼이라는 평가를 받은 빠른 드롭(커브)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The Vancouver Sun 81년 8월 14일



Choi, who throws 200 pitches a day. said most of his strikeouts came on 145-kilometre-an-hour fastballs and sinkers.
하루에 200개의 연습 투구를 한다는 최동원은 대부분의 탈삼진이 145km의 직구와 싱커였다고 말했다.


최동원은 후기리그부터 전성기 시절의 90% 가까이 기량을 회복했고, 7월 8일 첫 등판을 시작으로 9월 20일 마지막 등판까지 75일동안 48경기에서 무려 31경기에 등판하여 18승 6패 5세이브의 엽기적인 성적을 거두면서 롯데를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킨다.

대부분의 야구팬들과 전문가들이 84년 최동원을 평가할 때 한국시리즈만 부각하고 있다. 그러나 84년 후기리그에서 롯데의 29승 중에서 무려 80%를 최동원 홀로 마무리하는 원맨쇼를 연출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간혹 58년 NPB의 이나오를 84년 최동원과 비교하는 야구팬들이 있는데, 정확하게 따질 경우에 이나오는 최동원의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다. 58년 니시데쓰는 강팀이었지만 84년 롯데는 막장팀이었다. 그리고 니시데쓰가 일본시리즈에서 3연패를 할 때 2패가 이나오의 책임이었다(리그 수준을 떠나서 막장팀을 에이스 홀로 우승으로 이끈 경우는 84년 최동원이 유일하다).

84년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의 미러클 시리즈였지만 58년 일본시리즈는 이나오의 병주고 약준 시리즈였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나오는 투신(投神)으로 불리며 국가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반면에 최동원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차이점도 있다.

<참고> 1984년 한국시리즈 - 불멸의 최동원


투수에게 어깨부상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최동원은 84년에 기적적으로 부활했고 후기리그부터 과거 전성기 시절의 90% 가까이 기량을 회복했다. 그리고 막장팀이었던 롯데를 홀로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어깨부상에서 회복된 첫 해에 또 다시 연투 혹사를 하면서 다시는 수퍼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숫자 놀음에 빠져있는 어설픈 기자들과 야구팬들이 최동원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 86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80년대는 80년대의 상식과 가치관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80년대는 FA 시대가 아니었다. 인센티브 시대였고, 인센티브 항목에 방어율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승수) - (이닝) - (출전 경기수)가 더 중요했다.
 
84년 - 51경기 27승 13패 6세이브 14완투 1완봉 284이닝 (2.40)
86년 - 39경기 19승 14패 2세이브 17완투 4완봉 267이닝 (1.55)

(27승 > 19승) - (284이닝 > 267이닝) - (51경기 > 39경기)

시험 기간에 시험도 안 보는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도 있단 말인가? (그런 국보급 학생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야구 선수들을 평가하는 수많은 지표가 사용되고 있지만, 모두 메이저리그 기준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KBO, NPB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특히 80년대 KBO에 적용할 경우에는 황당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2명의 투수가 여기에 해당된다.

A - 47경기 25승 5패 10세이브 10완투 2완봉 269이닝 (2.00)
B - 34경기 25승 6패   0세이브 11완투 3완봉 226이닝 (2.79)


A와 B가 동일 인물이고 각각 다른 시즌의 기록이라면 명백하게 A시즌의 기록이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다른 두 투수의 동일 시즌(85년) 기록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단순히 기록으로만 평가하면 누가 더 뛰어난 투수인가?

당연히 A일 것이다. 그러나 B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10승 투수의 기량이었다. A는 김시진이고 B는 김일융이다.

김일융은 87년에 NPB에서 10승 투수로 부활하는데, 84년에 한국에 올 당시에는 내리막길이었으나 김일융 본인이 밝힌 바 있듯이 한국에서의 꾸준한 등판이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면서 다시 기량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실제로 85년부터 김일융의 NPB 복귀는 진행되고 있었다(6월 21일, 12월 26일 신문 기사).





KBO 기록으로는 김시진이 더 우수한 투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기량으로는 김일융에 비교될만한 투수는 아니었다. 또한 리그 수준을 떠나서 메이저리그 기준에서 만들어진 지표이기 때문에 아시아 리그 선수들에게 대책없이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참고> 에가와가 최동원에 비교될 수 있는 레벨인가?


다음은 NPB로 복귀하여 10승 투수로 거듭난 김일융의 피칭 영상이다.






> 반론/의견은 여기를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