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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vs 선동열, 1986/87년의 KBO 특급 에이스 컬럼


최동원과 선동열이 동시대에 특급 에이스로 활약한 시즌은 86년과 87년, 겨우 2시즌에 불과하다. 85년에 선동열은 계약이 늦어지면서 전반기(전기리그)에는 출전하지 못했고, 88년에 최동원은 구단과의 감정싸움으로 팀 훈련에도 제외되면서 선수생명이 끝나게 된다.


[ 2011년 기사 내용중에서 ]

최동원과 롯데의 결별 기운은 1988년 연봉 협상부터 싹텄다. 지루한 연봉협상에서 최동원은 구단 고위 관계자와 감정싸움을 벌였다. 이 관계자는 급기야 최동원에게 반성문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단호했다. "선수가 정당한 절차를 밟아 급격한 연봉 삭감을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냈다고 반성문을 써야 한다면 이게 무슨 프로일 수 있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롯데는 구단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최동원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최동원이 선수들의 결사체인 '프로야구선수회' 결성을 주도하자 롯데는 마침내 칼을 빼든다. 1988년 11월 23일 결국 롯데는 최동원을 삼성으로 트레이드한다.



- 1986년 -


86년은 선동열이 KBO 최고 투수로 등극한 시즌이다. 최동원과의 기록 비교에서도 확실한 판정승이었다.





최동원 - 39경기 19승 14패 2세이브 17완투 267이닝 (1.55)
선동열 - 39경기 24승   6패 6세이브 19완투 262이닝 (0.99)

이닝수를 제외하고 모든 주요 기록에서 선동열의 우세였다. 그러나 기록이 완료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전기리그까지는 최동원의 기록이 조금이나마 더 좋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최동원 - 23경기 12승 6패 1세이브 150 2/3이닝 23자책점 (1.37)
선동열 - 22경기 12승 4패 3세이브 144 1/3이닝 23자책점 (1.43)

전/후기리그 롯데와 해태의 성적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최동원이 얼마나 불운한 투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투수의 기록은 소속팀 전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전기리그 >                                      < 후기리그 >
1위 삼성 39승 15패 승률(0.722)      1위 OB 33승 19패 승률(0.635)
2위 해태 34승 18패 승률(0.654)      2위 해태 33승 19패 승률(0.635)
3위 롯데 30승 20패 승률(0.600)      3위 청용 31승 19패 승률(0.620)
4위 청용 28승 22패 승률(0.560)      4위 삼성 31승 22패 승률(0.585)
5위 OB 23승 29패 승률(0.442)      5위 롯데 20승 32패 승률(0.385)


후기리그에서 롯데의 팀워크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동원은 후기리그에서 겨우 7승 8패 1세이브를 기록했고, 선동열과 비교해서 모든 조건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롯데와 해태의 주요 공격 기록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롯데 - 타율(0.248) 37홈런 373득점
해태 - 타율(0.259) 99홈런 474득점

타율 차이가 1푼 이상, 홈런은 약 2.7배, 득점도 101점이나 차이가 났다. 즉 막장팀(롯데)과 대표팀(해태)의 전력 차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선동열이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당시의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었는데, 

쉽게 설명하면 전/후기리그 1위팀은 3점, 2위팀은 2점, 이런 방식에서 전기리그 1위인 삼성이 후기리그에서 하위권으로 떨어지면서 전기리그 2위인 해태는 후기리그에서 2위만 확정지으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고, 해태의 한국시리즈 직행이 확정된 후기리그 후반기부터 선동열이 기록(방어율) 관리를 할 수 있었다.


선동열이 기록 관리를 위해 등판했던 대표적인 경기를 꼽자면 9월 7일과 11일 경기인데,

9월 7일에 막장팀 2인자로 변신한 롯데에게 완봉승을 거두고, 11일에는 막장팀 1인자인 청보에게 완봉승을 거두면서 0점대 방어율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방어율 1.02). 중요한 사실은 선동열이 3일 휴식후에 또 완봉승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 많은 포스트시즌 경력에서 단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는 3일 휴식 선발 등판을 했고 2연속 완봉승까지 거두었다는 것이다.

<참고> 선동열 진짜 실력은 포스트시즌 기록


최동원의 경우에도 대표적인 경기를 꼽자면 7월 13일과 9월 4일 경기인데,
 
7월 13일 청보전에서 8회 1사까지 퍼펙트 피칭을 했으나 10회초에만 2실점을 하면서 패전투수가 된다. 즉 9회까지는 무실점으로 호투했으나 10이닝 2자책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동원은 후기리그 들어 3패만을 기록하게 된다(선동열은 3승).

9월 4일 OB전은 훨씬 더 한심했다. 9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으나 10회초에 3실점을 하면서 완투패를 당하는데, 최동원은 8월 29일 삼성전에서 연장 11회 완투승을, 이어 3일 휴식후인 9월 2일 청보전에서는 2이닝 세이브를 거두었다. 그리고 단 1일 휴식후에 등판했음에도 롯데는 9이닝동안 단 1득점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밖에 선동열의 86년 기록을 대단히 가치있는 기록으로 평가할 수 없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86년 이전 제도였다면 전기리그 우승팀인 삼성과 후기리그 우승팀인 OB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겠지만, 85년 삼성의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 때문에 만들어진 부실한 제도에 의해 전체 승률 1위팀인 삼성이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하는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고, 이는 해태가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삼성은 OB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피말리는 접전끝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선동열이 선발 등판한 1, 4차전을 다 잡아놓고도 누적된 피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9회에 동점을 허용하면서 좌절하게 된다. 여기서 86년 플레이오프를 간단하게 되돌아보면,

1차전은 1:0(삼성), 2차전은 3:5(OB), 3차전은 0:2(OB), 4차전은 2:1(삼성), 5차전에는 7:3으로 비교적 여유있게 삼성이 승리하지만 전력 손실이 너무 많았고 이어진 한국시리즈에서 역전패의 빌미가 되었다.

만약 KBO가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었다면 해태와 OB가 플레이오프를 치렀을 것이고, 해태의 우승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즉 해태와 선동열의 전성기는 86년에 새롭게 만들어진 부실한 제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9년부터 종합 승률제로 개선된다).


참고로 지금까지 지적한 내용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핵심 내용이 있는데,

야구에서의 타격은 익숙함과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타격에서 익숙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투수가 던지는 140km의 몸쪽 공을 일반인이 타석에서 경험하면 무서워서 뒤로 피하게 되는데, 그런 경험이 두 자리수가 되면 무서워도 피하지 않게 되며, 세 자리수까지 경험이 증가하면 공포심마저 사라지게 된다. 익숙함이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익숙해진 만큼 타이밍 잡기도 쉬워질 수밖에 없는데, 최동원과 선동열은 바로 이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야구는 선수층이 부실하고 최동원의 경우에는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연투 혹사가 심했던 투수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대학, 실업야구부터 시작해서 프로야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한국 야구의 주력 타자들을 상대했고, 그러다보니 프로 시절에는 각 팀의 주력 타자들 대부분이 대학시절부터 최동원을 상대한 경험이 평균적으로 세 자리수가 넘었을 정도였다.

여기서 잠깐 장명부의 기록을 보자.

83년 - 60경기 30승 16패 6세이브 36완투 427이닝 (2.34)
84년 - 45경기 13승 20패 7세이브 15완투 261이닝 (3.30)
85년 - 45경기 11승 25패 5세이브 10완투 246이닝 (5.30)

83년에 불멸의 대기록을 세웠으나 지나친 혹사 때문에 구위 저하로 84년부터 부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83년의 대기록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국 야구는 선수층이 부실하기 때문에 타자들의 임기응변 능력이 떨어지는데, 장명부의 노련한 투구와 변칙 투구폼은 상당한 강점으로 작용하면서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 야구대백과 내용중에서 ]

선발투수가 어려운 이유는 경기에서 타자를 여러번 상대하는 과정에서 타자는 점점 유리해지고 투수는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지난해(2010년) 프로야구 기록을 보자. 선발투수들은 경기에서 타자와 처음 상대할 때 0.264의 피안타율을 기록했다. 이 수치는 두 번째 상대할 때 0.280으로 치솟았고 피장타율 역시 0.396에서 0.430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네 번째 상대했을 때 피안타율은 0.292에 이르렀다.


84년에 구위가 저하되었다는 주장도 사실이지만 뚜렷한 구위 저하는 85년부터이다. 83년에 140km 중/후반까지 나왔던 최고 구속이 85년에는 140km도 안 나왔을 정도로 떨어졌다. 84년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바로 이러한 원리 때문에 장명부는 (전성기 시절에 비해 2/3에 불과했던) 86년의 최동원을 이렇게 평가했던 것이다. "최동원은 지금 당장 일본에 가도 확실한 10승 투수다!"

<참고> 83년 장명부는 알려진 것처럼 엽기적인 투수였을까?


반면에 선동열은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현재(21세기)의 투수들보다 관리를 더 잘 받았던 투수였기 때문에 프로에서는 거의 모든 타자들에게 생소한 투수였다. 또한 최동원이 막장팀 2인자였던 롯데의 에이스였던 반면에 선동열은 최강팀 해태의 에이스였다는 점에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86년 최동원 - 39경기 19승 14패 2세이브 17완투 267이닝 피홈런(7) 탈삼진(208) 방어율(1.55)
91년 선동열 - 35경기 19승   4패 6세이브 12완투 203이닝 피홈런(8) 탈삼진(210) 방어율(1.55)

86년 최동원과 91년 선동열은 정확하게 동갑이며 91년 타자들이 86년 타자들보다 파워와 기술이 더 향상된 타자들이었지만, 최동원이 막장팀 2인자였던 롯데의 에이스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선동열과 사실상 동등한 조건이었다고 평가해도 되는데, 기록에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거의 모든 부문에서 최동원이 선동열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타격에서 익숙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 1987년 -


87년에 선동열은 에이스 역할을 별로 하지 못했다. 선발로 등판한 경기도 11번에 불과했고, 시즌 후반기에 지쳐있는 타자들을 상대해서 올린 성적의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최동원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동원 - 32경기 14승 12패 2세이브 15완투 224이닝 (2.81)
선동열 - 31경기 14승   2패 6세이브   7완투 162이닝 (0.89)

전체적인 기록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4월에 7경기, 5월에 4경기, 6월에 1경기, 7월에 3경기, 8월에 4경기, 그리고 9월 2일부터 10월 2일까지 시즌 후반기에만 무려 12경기에 등판하여 지쳐있는 타자들을 상대해서 그럴듯한 기록만 남긴 시즌이었고(가장 순위 경쟁이 치열한 4개월동안 겨우 12경기 등판), 최일언과의 맞대결을 회피하면서 언론과 팬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참고> 선동열 자서전의 최일언과의 맞대결 승리는 소설


87년의 선동열은 특급 에이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최동원의 87년 기록은 해태와 비슷한 수준의 강팀이었던 삼성의 에이스 김시진의 기록과 비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비교일 것이다.

최동원 - 32경기 14승 12패 2세이브 15완투 224이닝 (2.81)
김시진 - 33경기 23승   6패 0세이브   7완투 193이닝 (3.12)

80년대의 롯데가 어떤 팀이었는지 최동원과 김시진의 기록 비교에서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최동원도 86년부터는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특히 3년 연속 20승 이상의 대기록을 수립할 수 있었던 시즌 마지막날 OB전에서 9회말에 3:1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김형석에게 동점 홈런을 허용했을때 수퍼에이스 최동원도 그 홈런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막장팀 2인자였던 롯데를 홀로 우승으로 이끌었던 진정한 수퍼에이스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전성기 시절의 최동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제 2의 전성기였던 84년 후기리그에서 결정적인 경기에서의 마지막 9회에 최동원을 상대로 2점 차이를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참고> 박찬호보다 극적이었던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


 

- 1986년 9월 17일 롯데 vs OB, 9회말에 동점(2점) 홈런을 친 김형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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