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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보다 극적이었던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 컬럼


최동원은 81년 1월에 세미프로팀 롯데와 총액 6천 6백만원에 계약하게 되는데(주택복권 1등 당첨금 3천만원) 계약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협상 기간만 6개월이 넘게 걸렸고 세무당국은 세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연예인과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기도 했다.


[ 2011년 기사 내용중에서 ]

1981년 2월 28일 롯데는 최동원과 입단에 합의하며 총 5000만원을 계약금으로 주기로 했다. 2100만원은 현금으로, 2900만원은 6개월짜리 약속어음으로 줬다. 선수 계약금을 약속어음으로 준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최동원은 롯데의 어음을 믿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실업 롯데는 끝내 2900만원의 약속어음을 결제해주지 않았다. 1982년 세계아마야구선수권대회를 마치고 1983년 프로 롯데에 입단할 때 최동원이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최동원과 롯데의 불신 관계가 시작됐는지 모른다.


참고로 당시 세미프로리그의 경기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10개팀이 약 18일동안 라운드(9경기) 방식의 경기 일정으로 전기리그 2라운드(18경기), 후기리그 2라운드(18경기)를 치렀고 전/후기 우승팀이 5전 3선승제의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현재의 KBO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데,

봄(전기 1차 포스트시즌 ━ 전기 2차 포스트시즌) ━━ 여름 ━━ 가을(후기 1차 포스트시즌 ━ 후기 2차 포스트시즌)

전/후기리그 사이에는 여름내내 공백 기간이 있었는데 그 기간동안 국내/외에서 열리는 각종 대회 경기를 치렀다. 현재의 프로야구 일정과 비교해서 에이스들에게는 훨씬 더 힘든 일정이었고 당연히 혹사는 말도 못할 정도로 심했다. 그래서 20대 후반이면 선수생명이 끝났다.


롯데에 입단한 최동원은 동계훈련이 부실한 상태에서 첫 등판을 하게 되는데, 당시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개막후 이틀동안 9경기에서 33개의 홈런... 대부분의 경기가 홈런으로 판가름... 대학의 명성있는 투수들은 스카우트의 와중에 제대로 기량을 다듬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는 듯. 실업무대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었던 대학최고의 투수 최동원도 롯데 유니폼을 입은 첫 데뷰전에서 홈런 2개를 포함 9안타를 맞은 것은 타고투저를 반증.

대한야구협회에서는 홈런 양산의 원인에 대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스카이라인의 반발력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볼의 정밀 분석을 전문기관에 의뢰할 계획. 장타력 향상은 알루미늄 배트 사용에도 연유가 있긴 하나 홈런 사태는 타력의 향상에 대한 투수력의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귀결지어질 듯.

부진은 첫 경기가 유일했고 전기리그 15번째 경기만에 롯데가 13승을 거두며 우승을 확정지을 때 최동원은 거의 전 경기에 출전하여 무려 12승 1패의 엽기적인 기록을 세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동원이 소화한 이닝수가 무려 120이닝이 넘었다는 사실이다.

81년 이전의 과거에도 최동원처럼 많은 이닝을 던졌던 투수들이 존재했지만, 그건 나무 배트를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이다. 알루미늄 배트가 사용된 이후에는 제 아무리 내구력이 뛰어난 이닝이터라도 최동원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여담이지만, 지금까지 최동원의 전성기 시절을 다룬 글에서 사실 그대로 기술한 적이 없다. 대폭 축소하거나 생략했다. 왜냐하면 요즘 야구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축소, 생략한 내용도 의심하고 있다).


과거 국제대회는 현재와 비교해서 많이 달랐다. 무조건 이기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였다. 냉전이 종식되고 90년대부터 스포츠 산업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속되면서 비로소 아마추어 스포츠가 아마추어 다워졌지만, 과거에는 말이 좋아 아마추어지 어떤 종목이든 국제대회를 대비하여 특별하게 조련된 선수들이 참가했고 국가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파 판정도 상당히 많았다.

미국 야구 대표팀은 대학생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졸업 후에는 보통 더블A부터 시작했고 트리플A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국제대회를 대비하여 특별하게 조련된 선수들이 참가했기 때문에 마이너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현재의 미국 대표팀과 비교해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팀-워크에 있어서는 강점이 더 많았다.

최동원은 공백 기간에도 각종 대회와 미국 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도 계속해서 출전하는데 난타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에와서 극악한 선빠들이 최동원을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사례로 드는 경기들은 대부분 비공식 대회의 경기들이다. 최동원이 공식 경기에서 난타 당하고 강판된 경기는 78년 세계선수권에서의 쿠바전이 사실상 유일한데, 이 또한 실상을 알게되면 경악할 것이다.

다음은 78년 세계선수권에서의 등판 일지이다(날짜를 자세히 보기 바란다).

8월 28일 - 미국전       0:2 패배 9이닝 완투    (2실점, 탈삼진 11개)
8월 29일 - 캐나다전    7:4 승리 3이닝 구원    (7회 무사 1, 2루에 등판하여 무실점)
8월 30일 - 일본전       5:4 승리 1이닝 구원    (9회에 등판하여 무실점)
8월 31일 - 니카라과전 ---------- 3이닝 구원    (4회 끝나고 우천 취소)
9월   1일 - 이탈라아전 3:2 승리 6이닝 구원    (4회에 등판하여 무실점)
9월   2일 - 호주전       7:3 승리 5.1이닝 구원 (4회 2사에 등판하여 무실점)
9월   4일 - 니카라과전 6:3 승리 9이닝 완투    (3실점, 탈삼진 16개)
9월   6일 - 쿠바전(선발 등판해서 2이닝동안 5실점하고 강판)

니카라과전에서 쿠바 주심은 최동원의 코너워크된 공을 잡아주지 않는 편파 판정을 하였고, 이 때문에 1회에만 2실점, 3회에는 1점 홈런까지 맞아 2:3으로 뒤졌으나 냉정을 되찾은 최동원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4회부터 나머지 아웃 카운트 대부분을 삼진으로 잡아낸다.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수없이 던졌으며, 이 대회에서의 연투 혹사로 78년 이후에는 155km가 넘는 강속구를 더 이상 던질 수 없게 된다.

최동원이 등장했을 때 아시아 야구사에 최동원보다 더 빠른 공을 던졌던, 그리고 최동원에 비교될만한 이닝이터는 존재한 적이 없다. 심지어 일본 프로야구에도 155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졌던 투수는 존재한 적이 없다. 또한 일본 야구가 우물안에서 창조해 낸 전설의 이닝이터들이 최동원처럼 연투 혹사를 했다면, 단언하건데 선수 생명은 딱 1년이면 끝났다.

나무 배트를 사용하는 우물안 리그에서는 개구리들끼리의 이닝이터 전설 놀이가 가능할 수 있어도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는 북미 선수들을 상대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연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는 북미 선수들을 상대로 엽기적인 연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구속, 구위가 거의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쿠바전에 한계에 이르렀고 결국 무너졌던 것이다.

<참고> 에가와가 최동원에 비교될 수 있는 레벨인가?


동계훈련이 부족했던 최동원은 계속된 연투로 인해 대륙간컵 대회를 앞두고 발목 부상을 당하게 되는데, 그런 상태에서도 대회에 참가하여 연투를 이어간다. 세계야구대회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81년 대륙간컵에서도 최동원의 엽기적인 연투는 계속된다.

70년대 중반부터 캐나다에 야구 인기가 급상승했고, 그 결과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창단되었으며, 그래서 캐나다 국민들도 대륙간컵 대회에 관심이 많았다. 당연히 캐나다 대표팀의 전력도 탄탄했다(과거 메이저 대회에서 미국, 쿠바를 모두 이긴 유일한 팀).


[8월 8일 미국전] 9회말 1사까지 한국이 4:1로 리드하고 있었으나 몸 상태가 안 좋았던 최동원의 구위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연속 안타를 허용했고 1사 1, 3루에 이선희가 구원 등판했지만 안타와 볼넷을 허용하고 김시진에게 공을 넘기게 된다. 그러나 김시진마저 무너지면서 4:6으로 역전패를 당하게 된다. 언뜻 보기에는 이선희, 김시진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대회에서 최동원을 제외하고 한국, 일본의 거의 모든 투수들이 북미 타자들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북미 야구가 강세를 보인 대회였다(일본은 6위에 그친다).

[8월 10일 도미니카전] 선발 등판한 최동원은 힘으로 도미니카를 제압했다. 1실점 완투승으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미국전에서 8.1이닝 투구, 그리고 단 하루만 휴식한 투수가 9회까지 변함없이 강력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최동원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3일 휴식은 꿈이었고 2일 휴식은 사치였다. 아시아 야구사에 전무후무했던 진정한 투신(投神)이었다.

[8월 13일 호주전] 11일 일본전에서 황규봉, 이선희가 호투하면서 2:0으로(아시아 국가간의 경기에서는 투수들이 호투했다.) 이겼기 때문에 최동원이 그 동안의 국제대회에서 가장 여유있게 등판한 경기였다. 콜드게임으로 끝내기 위해 7회에 등판해서 1이닝만 던졌다.

[8월 14일 캐나다전] 예선 마지막날 개최국 캐나다와 4강 결정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 경기는 캐나다 공영 방송을 통해 캐나다 전역에 중계방송까지 된다. 이날 최동원은 11개의 탈삼진을 포함하여 1피안타 1:0 완봉승을 하면서 캐나다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한국 언론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경기가 끝난 후 캐나다 관중들은 최동원의 놀라운 피칭에 감격해서 '초이'를 외쳤고 현지 매스컴들은 '최동원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라고 격찬했다."

[8월 16일 쿠바전] 최동원이 국제대회에서 가장 어이없게 등판한 경기가 바로 이날이었다. 이기기 위해 등판한게 아니라 콜드게임패를 막기 위해 등판했던 것이다. 선발 투수 김시진이 2회에 난타를 당하자 이선희가 구원 등판했으나 쿠바의 강타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할 수 없이 최동원이 3회에 구원 등판하여 추가 실점을 막으면서 겨우 콜드게임패를 면할 수 있었다. 최동원은 5.2이닝동안 2실점(1자책)으로 호투했으나 1:9로 패배하면서 준결승에서 탈락한다.

[8월 17일 도미니카전] 북미 국가를 상대로 최동원 외에는 견적이 나오지 않았던 어우홍 감독은 불가피하게 최동원을 선발로 등판시킨다. 최동원은 3회에 1실점한 이후에 겨우 버티고 있었다. 6회 김정수의 3점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했으나 지쳐있던 최동원은 7회 2사 1, 2루에서 동점 2루타를 허용한다. 최동원은 7이닝 3실점했고 연장 15회말에 임호균이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면서 패배한다(4위).


대회가 끝나고 뉴욕타임즈는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최동원에게 메이저리그 계약 오퍼를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블루제이스 부사장 팻 길릭은 "그(최동원)는 아마도 지금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투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메이저리그 계약을 오퍼했다."라고 말했다. 길릭은 최동원이 계약에 관심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27개월동안 군복무해야 하는 한국의 징병제도라는 장애와 마주했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계약이 성사된 것도 아닌데 뉴욕타임즈가 오퍼한 사실까지 보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메이저리그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 야구를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프로야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오퍼 사실만으로도 뉴스가 되기에 충분했다.

84년에 메이저리그와 NPB가 스카웃 경쟁을 했다는 곽태원과 LA다저스에게 50만달러 오퍼를 받았다는 선동열 관련 기사는 미국에 존재하지 않는다(84년 LA올림픽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임에도 미국에 관련 기사가 존재하지 않는 희대의 미스터리).

<참고> 선동열 자서전의 박찬호 유학 편법은 소설


그리고 기사에 보면 가장 큰 걸림돌로 병역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최동원의 병역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은 비정상적인 방법(체육관 선거)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독재자의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따라서 반대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병역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

캐나다 국민들이 최동원을 원했고, 캐나다 언론이 여론을 조성하면서 캐나다 정치인까지 이 일에 개입하게 되는데, 때마침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캐나다에 방문중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교 문제로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캐나다 국민 대부분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그 시절에 말이다(최동원은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면담까지 하게 된다).


9월 24일 Petersburg Times에 실린 AP, UPI가 타전한 기사를 보면,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최동원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록시키는 최초의 한국태생 선수로 만들었다.

23살 우완투수 최동원은 블루제이스의 선수 인사 관리자 엘리엇 웨일, 스카우팅 감독 밥 적, 그리고 스카우터 웨인 모건의 한국방문에 따라 지난 주 계약서에 사인이 이루어졌다.

최동원은 블루제이스의 40인 로스터에 등록될 것이며
, 내년 2월 듀네딘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석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에는 차질이 있다. 최동원이 한국에서 병역 의무를 아직 수행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블루제이스는 한국 정부가 그의 병역 의무를 9월 28일에 면제해 줄 것으로 믿고 있으며 최동원은 특별 면제를 받는 다른 운동선수들과 함께 리스트에 오를 것이다.

5피트 10, 175파운드의 최동원은 지난 8월 에드먼튼에서 열린 대륙간컵대회에서 한국 대표로 투구하면서 블루제이스에게 스카웃되었다.

웨일은 "그는 평균 이상의 제구력과 함께 메이저리그 평균의 직구, 평균의 커브, 그리고 평균 이상의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다. 그가 블루제이스의 주전 선수로 그의 선수 생활을 시작할 것에 대한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카우터들은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즉시 피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 정부가 그(최동원)의 병역 의무를 9월 28일에 면제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9월 23일 한국 언론에 나온 기사를 보면,





기사 마지막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동원은 군복무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9월말 정기국회에서 국가대표선수등에 대한 병역특혜법안이 통과되어야 블루제이스 입단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최동원의 병역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다른 종목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운동선수들이 함께 병역혜택을 받게 된다(82년 세계선수권 우승의 병역혜택과 최동원은 무관하다).





이 외에도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엘리엇 웨일이 최동원을 평가한 부분이다.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는데,

"최동원은 평균 이상의 제구력과 함께 메이저리그 평균의 직구, 평균의 커브, 그리고 평균 이상의 슬라이더"

그런데 조금 이상한게 보일 것이다. 평균 이상의 슬라이더?






 86년 8월 19일 해태전 9회에 던진 드롭 커브(152구째 마지막 투구)


웨인 모건은 보고서에서 빠르고 각도 큰 브레이킹볼을 최동원의 최고 강점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것을 인사 관리자인 엘리엇 웨일은 평균 이상의 슬라이더라고 말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최동원의 드롭 커브는 카메라 각도 때문에 훨씬 높은 위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구든과 비교해서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그리고 예각 지점도 (높은 위치 만큼) 조금 더 레이트 브레이크가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타자를 보면 히팅 포인트를 순간적으로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람의 눈깔이 얼굴 좌/우에 붙어있고 눈 높이 근처에서 예각이 형성되면서 빠르고 급격하게 떨어지는 구질은 리그 수준에 관계없이 타자들이 히팅 포인트를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엘리엇 웨일은 최동원의 커브를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이라고 했는데,







타자를 보면 히팅 포인트를 놓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리를 들었다가 주저앉는 듯한 타격 자세가 되는 것은 커브의 예각 지점이 눈 높이 위에서 늦게 형성될 때 (최고 품질의 명품 커브일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명품 커브는 커브의 달인이 아닌 이상 의지만큼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실투 비율이 매우 높다. 하지만 최동원과 구든은 지쳐있지만 않으면 언제라도 명품 커브가 가능했다(최동원과 구든이 이닝이터인 이유이다).

최동원의 커브는 요령으로 던지는 커브가 아니라 힘을 바탕으로 던지는 커브였기 때문에 체력적인 여건에 따라 품질도 많이 달랐는데, 1980년에 일본 프로야구 오리온스 초청 경기에서도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는 1차전에서는 장훈에게 (노장이었기 때문에) 커브만 던졌어도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했다.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 수준의 타자였던 장훈도 생전 처음 보는 커브였기 때문이다(2연속 삼진, 내야 땅볼).

<참고> 최동원이 상대한 NPB 퍼시픽리그


또한 대륙간컵에서 측정된 최동원의 구속이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이라는 말을 했는데,

대륙간컵에서 최동원은 10일동안 6경기에 등판해서 무려 40이닝을 던졌고 도미니카, 캐나다전에서는 150km가 넘는 빠른 공을 상당히 많이 던졌다. 78년을 마지막으로 155km가 넘는 강속구는 더 이상 던질 수 없었지만 여전히 150km 정도의 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던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도미니카, 캐나다전에서의 구속은 당시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보다 꽤 높은 편이었다).




We knew he's a major league pitcher and it would take a real effort to stay close.
He's so fast. he can almost tell you the fastball is coming and you can't do much about it.

우리는 최동원을 메이저리그 투수로 알았다. 너무 빨라서 패스트볼을 던진다고 알려줘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81년 어깨 부상 이후에
전성기의 90% 가까이 회복된 84년 한국시리즈(1차전 완투 - 2일 휴식 - 3차전)에서의 투구




마지막으로 최동원의 제구력에 대해서는 평균 수준보다 높게 평가했는데,

제구력에는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계선 피칭이 있고, 스트라이크존의 상/하 - 좌/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현란한 피칭이 있는데, 최동원은 후자에 해당된다. 현란한 피칭은 경계선 피칭에 비해 볼넷/실투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대체적으로 이닝이터인 경우가 많고 승부사 기질이 있기 때문에 큰 경기에 강점이 있으며, 희소성 때문에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런 유형의 투수들을 훨씬 높게 평가한다.

<참고> 최동원의 제구력과 경기운영 능력


메이저리그에는 이런 말이 있다. "평균 이상의 구속과 뛰어난 제구력, 그리고 명품 커브를 갖춘 투수는 두 자리 승수를 보증한다." 그리고 메이저리그는 그 조건을 갖춘 투수를 발견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82년은 이미 메이저리그 진출이 불가능했고, 어깨부상으로 최고 구속이 140km도 잘 안 나올 때이다. 그럼에도 최동원에게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82년 9월).





롯데자이언츠 입단 직전까지도 최동원에게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83년 1월).





롯데자이언츠에 입단한 이후에도 최동원에게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83년 8월).


엘리엇 웨일의 평가는 신문의 특성상 내용 일부가 생략 또는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 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스카우터들은 최동원이 메이저리그에서 즉시 피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82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최동원의 이름이 등록되어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The Complete Handbook of Baseball 1982 (Zander Hollander, Penguin Group (USA) Incorporated, 1982)


또한 엘리엇 웨일을 직접 취재했던 한국일보 기자에 의하면, "왜 최동원을 데려오려고 하냐고 물으니 '완벽한 제구력(Perfect control) 때문'이라고 하던 엘리엇 웨일 선수개발팀장의 말이 생각난다."

<참고> 양키스, 다저스를 물리치고 최동원을 스카웃 한 블루제이스


그러나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무산되었고, 그 이유가 병역 문제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실은 이해 관계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기사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최윤식씨는 최동원이 내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좀 더 국내활동을 계속할 수 없겠느냐는 질문에 "동원이는 5년간 국가대표로 헌신해왔다. 가족들도 이제는 동원이가 소신껏 생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블루제이스로부터 새로운 연락이 있었다."고 밝힘으로써 미국 프로야구진출 문제도 계속 추진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최동원은 메이저리그 진출을 원했고 최동원의 아버지도 동의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뭔가 걸림돌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그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은퇴선언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안타깝게도 진짜 은퇴의 길을 가게 된다.

메이저리그 계약 파문으로 심경이 복잡했던 최동원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집중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훈련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10월 25일부터 펼쳐진 한국시리즈에서의 상상을 초월하는 연투 혹사로 어깨부상을 당하게 된다.

81년에 10월 날씨는 현재의 11월 날씨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추운 날씨의 연투 혹사는 투수에게 (어깨가 빨리 식기 때문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데, 7일동안 펼쳐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무려 42이닝이라는 불가사의한 투구를 했던 것이다. 실제로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4월에는 잠실야구장 야간 경기때 겨울옷을 입어야 했을 정도로 추운 시절이었다.

다음은 최동원의 등판 일지이다(3, 5차전 이닝수에 오차가 있을 수도 있다).

10월 25일 - 1차전 0:3 패배 9이닝 완투 (3실점)
10월 26일 - 2차전 4:5 패배 7이닝 구원 (무실점, 9회초에 종료)
10월 27일 - 3차전 6:6 연장 6이닝 구원 (3실점, 11회 무승부)
10월 28일 - 우천연기
10월 29일 - 4차전 7:4 승리 8이닝 선발 (3실점 1자책, 8회에는 1루수로 수비)
10월 30일 - 5차전 5:3 승리 3이닝 구원 (무실점)
10월 31일 - 6차전 6:4 승리 9이닝 완투 (4실점)

5전 3선승제의 실업야구 한국시리즈에서 2연패 이후에 연장전 무승부, 그리고 3연승으로 롯데가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으며 최동원은 MVP와 신인왕을 동시 수상하게 된다.





투수에게 어깨부상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최동원은 84년에 기적적으로 부활했고 후기리그부터 과거 전성기 시절의 90% 가까이 기량을 회복한다. 그리고 막장팀이었던 롯데를 홀로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어깨부상에서 회복된 첫 해에 또 다시 연투 혹사를(총 100경기에서 51경기에 등판) 하면서 85년 이후에는 과거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다시는 보여주지 못한다.

선동열과의 맞대결이 이루어진 86, 87년의 최동원은 전성기 시절의 2/3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최동원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최동원의 전성기를 알고 있는 야구팬들은 선동열과의 비교를 불허하는 것이다. 급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에 한국은 세계 무대에서 야구 강국이 아니었다. 최동원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면서 81년까지 야구 강국 행세를 했던 것 뿐이다. 시대를 초월했던 위대한 천재를 희생시킨 대가로 82년 세계선수권을 유치할 수 있었고 선동열이라는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참고> 최동원이 남긴 자취 - 82년 세계선수권과 구도 부산


지난 일이지만 정말 안타까운 것은, 만약 프로야구 출범이 81년이었다면 최동원이 메이저리그와 계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과거에 비해 부담없는 경기 일정에서 수없이 많은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반대로 프로야구 출범이 83년이었다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정말 뭔가를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최동원이 81년에 현재의 포스트시즌보다 훨씬 더 힘든 일정의 국내/외 공식 경기에서 소화한 이닝수는 약 300이닝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한 타자들만 상대한 이닝)으로 현재의 프로야구 정규시즌과 비교할 때 400이닝이 넘는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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