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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이 경험한 쿠바와 조계현이 경험한 쿠바는 이만큼 다르다.


대단한 야구광이었던 카스트로는 혁명 직후인 1960년에 아마추어 리그를 만들었고 야구를 통해 국론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야구로 미국을 앞서겠다고 세미프로 리그를 출범하면서 선수들의 신분을 공무원으로 격상시켰다. 다시 말해서 쿠바에서 세미프로 선수가 된다는 것은 부와 명예를 보장받는 수단이었다.

이러다 보니 빠르면 6살부터 야구를 시작하는데, 10살이 넘으면 테스트를 받고 재능이 출중한 소년들은 야구 전문 학교에 진학해서 특별한 훈련을 받게 되고 나머지 소년들은 별도의 리그에서 경험을 쌓았다(야구 전문 학교에서도 매년 테스트가 이루어지며 수준에 미달한 경우에는 탈락되는 구조이다).

쿠바 야구 전성기 시절에는 아마추어팀이 4천여개에 달했고 전체 선수는 12만명이 넘었다. 즉 쿠바 국민 100명(남자만 계산하면 50명) 중에서 1명은 야구 선수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번에는 쿠바의 세미프로 리그를 살펴보자.

쿠바에는 16개의 국립 클럽팀이 있다(선수들이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국립 클럽팀이라고 부른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16개팀(하바나, 유벤투드에만 2개팀)이 동부와 서부로 8개팀씩 나누어져 있고 각각 4개팀씩 그룹으로 또 나누어져 있다. 즉 8개팀으로 2개 리그를 구성하며 각 리그에 4개팀씩 2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세미프로 팀 소속으로 아마추어 팀이 동일하게 16개팀이 있는데, 일종의 2군 시스템이라고 보면 된다.


국제 대회가 열리지 않는 10월에 리그를 시작하여 다음해 3월까지 총 90경기를 치른다. 각 그룹의 우승팀간에 플레이오프를 거쳐 각 리그의 우승팀이 7전 4선승제의 내셔널 챔피언쉽 시리즈를 치른다.

시리즈가 끝나면 각 리그 상위팀 위주로 대표 선수를 구성하여 4월부터 열리는 국제 대회에 참가한다. 국제 대회에서 항상 쿠바가 강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80년대의 쿠바 대표팀은 메이저리그 단일 팀과의 상대 전적에서도 승률이 높다.

아직까지도 원로 야구인들이 쿠바 야구를 메이저리그 수준 이상으로 착각하는 이유가 바로 80년대의 강력했던 쿠바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착각에는 다음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1) 80년대 후반부터 쿠바 야구는 내부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공산권의 붕괴는 쿠바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특히 96년에 미국은 쿠바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을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쿠바를 압박했다. 이때부터 카스트로는 더 이상 혁명가가 아니었다. 전형적인 독재자로 변해갔고 쿠바의 모든 국가 조직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야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요즘 야구팬들도 쿠바 야구의 전성기 시절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80년대의 쿠바 야구를 너무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80년대 쿠바 대표팀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팀은 메이저리그 팀이 유일했다. 참고로 80년대 야구 리그의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메이저리그 > 쿠바리그 > (트리플A, 멕시칸리그) > 일본NPB

그렇기 때문에 80년대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 야구를 아예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일본 프로야구 조차 40년이 넘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멕시칸리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리그였기 때문에 취급하지 않았을 정도다. 하지만 쿠바리그와 멕시칸리그는 중/남미 지역의 정치상황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걸었고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일본 프로야구보다 낮게 평가받고 있다.


(2) 쿠바 선수들에게 알루미늄 배트는 도깨비 방망이었다.

메이저리그처럼 나무 배트를 사용했다면 80년대 메이저리그 강팀과 10번 대결해서 3번 정도는 이길 수 있는 수준은 되었지만, 전체 승률에서 앞설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국에 프로야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변수를 고려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다.




- 2009 야구월드컵 (미국 vs 쿠바) -


결론적으로 류현진이 상대했던 쿠바는 80년대 전성기의 쿠바와 비교해서 더 발전된 전력도 아니었고, 더구나 나무 배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단한 강팀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그렇게 대단했던 쿠바와, 그것도 류현진과 거의 동일한 조건이었던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상대했던 한국인 투수가 존재했었다. 바로 조계현이었다. 먼저 경기 내용부터 살펴보자.

85년 대륙간컵에서 극적으로 결승전에 진출한 한국팀의 선발 투수는 조계현이었고, 1회말에 1실점을 했으나 이후부터 대단한 호투를 하면서 3:1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러나 6회 2사 2, 3루의 위기에서 강습 타구를 3루수 백인호가 빠뜨리면서 동점을 허용했고, 8회말에는 외야수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 주면서 준우승에 머무르고 만다(조계현의 실질적인 자책점은 단 1점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경기 내용인데, 조계현이 허용했던 거의 모든 타구가 땅볼 또는 단타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류현진과의 차이점이었다. 류현진은 1점 홈런 2개로 2실점 했고, 펜스 가까이 가는 2루타와 플라이볼을 합칠 경우에 최소한 2개 정도가 더 있었는데, 과거처럼 알루미늄 배트였다면 그건 전부 홈런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조계현의 피칭 내용이 류현진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는 것이다.

조계현이 그렇게 대단한 피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 야구에서도 통할 수 있는 구질이 있었고, 빼어난 제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데, 조계현의 싱킹 패스트볼과 변형된 스플리터는 당시의 선진 야구에서는 물론이고 현재의 KBO에서도 여전히 동일하게 통할 수 있는 강점이 있는 구질이었고, 제구력에 있어서도 최정상급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구력은 타자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지만 모든 투수가 그런 원리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너무 많아 설명을 생략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대단한 조계현을 미국, 일본에서는 어째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구속 때문이었다. 제구력이라는게 항상 좋을 수 없고 경기 중에도 일시적으로 흔들릴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구속이 떨어지는 투수는 위기 순간을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사에 조계현처럼 불운했던 투수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은데, 사실 조계현은 고교 시절에 강속구 투수였다. 조계현이 강속구를 잃어버린 이유는 고교 시절의 혹사 때문이었고, 그 내막에는 불운했던 1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고교시절의 혹사는 2학년때부터 시작되는데, 조계현은 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가면서 1학년때부터 혹사를 했고, 결국 3학년때 팔꿈치가 망가지면서 강속구를 잃어버리게 된다. 불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학 졸업 후에는 88년 올림픽 때문에 프로 진출이 유보되면서 89년에야 프로에 입단할 수 있게 된다. 즉 모든 원인은 그 1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같으면 류현진처럼 수술을 받고 다시 강속구를 회복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 시절에는 그런 것도 없었고 이후에 조계현은 기교파 투수로 변신하였고 완성도 높은 다양한 구질을 구사하면서 90년대에는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참고> 조계현은 고교시절부터 급이 다른 투수였다.


대부분의 야구팬들이 과거의 스타 선수들을 평가할 때 무조건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정확한 평가이기는 하나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쿠바전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류현진이 상대한 쿠바보다 조계현이 상대한 쿠바가 더 강팀이었음에도 훨씬 더 훌륭한 피칭을 했었다는 명백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오판의 중심에는 선동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가대표 시절에 항상 쿠바를 피했으며 82년의 그 괴상했던 안방 세계대회를 제외하고는 미국전에서도 실망스런 투구만 했던 선동열이 무조건 최고라고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 다른 투수들은 저절로 선동열보다 못한 투수가 되는 것이며, 당연히 류현진보다 더 뛰어난 투수는 없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과거 선수들의 절대 기량을 평가할 때 그 시절의 전체적인 수준을 감안하여 평가하지 않았다면, 어떤 평가를 했던 공정한 평가를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조계현 시절이었다면 류현진은 고교 시절에 선수 생명이 끝났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과거의 사람을 현재의 시각에서 재단하는 것은 나중에 태어난 자의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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