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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선동열이 경험한 일본 프로야구 NPB 컬럼


최동원은 만 19세였던 1977년에 일본의 야구 전문 기자들로부터 한국 최고의 투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12일부터 최동원의 연습 광경을 주의깊게 지켜본 일본의 야구 전문 기자들도 한국 제 1의 투수라고 칭찬.





립서비스라고 볼 수도 있으나 가네다 감독의 평가는 훨씬 더 구체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네다 감독은 최동원의 스카웃 가능성에 대해서 "한 팀에 외국인 선수 2명밖에 둘 수 없는 일본 프로야구의 규정과 최동원의 병역 문제 때문에 당장 스카웃하기는 곤란하다."고 아쉬워했다.

그 시절에는 일본 프로야구도 용병이 2명으로 제한이 있었고 2월 17일이면 모든 구단이 이미 용병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네다 감독의 발언도 보기에 따라서는 립서비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가네다 감독은 전혀 다른 말을 하는데,





미국인 투수 맥날디와 함께 스카웃 여부를 테스트해 본 가네다 감독은 처음에는 "욕심나는 선수"라고 말하다가 17일 "꼭 포섭해야겠다"고 굳은 결의를 보인 것.
최동원을 영입하기로 결심한 가네다 감독은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데, 최동원을 양자로 들여 일본인 자격으로 영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에서 최동원의 일본 진출은 무산되지만 가네다 감독의 안목이 정확했다는 것이 입증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가네다(1933년생) 2011년 인터뷰 내용중에서 ]

한국 야구계에도 선생님처럼 배짱과 자신감으로 ‘칠 테면 치라’는 식으로 타자를 상대했던 투수가 있습니다. 혹여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최동원’이란 투수가 있었는데요.(주 : 인터뷰 당시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은 작고하기 전이었다) 1970년대 후반 선생님께서 최동원과 김시진(넥센 감독)의 뛰어난 기량에 탄복해 ‘양자로 입적해서라도 꼭 키워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신 걸로 압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양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모르겠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 싶군. 안경 쓴 선수는 기억이 나네만, 내가 양자 입적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은 없네. 물론 지금도 한국의 유망주들이 내게 온다면 노하우를 알려줄 용의와 진정은 있네. 투구폼만 봐도 한눈에 ‘좋아질까, 아닐까’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최동원이 아직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11월에 니카라과에서 열린 수퍼월드컵 대회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활약을 하면서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된다. 실제로 90년대까지 니카라과 야구팬들이 최동원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의 관심을 받게 된다.





수퍼월드컵 대회에서 한국팀의 주전 투수로 활약한 최동원이 미국 프로야구 볼티모어 오리올즈팀으로부터 입단 교섭을 받았음이 2일 밝혀졌다.
만 19세에 불과한 최동원을, 더구나 당시에는 미국에서 아시아 야구를 아예 취급하지 않던 시절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터의 관심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사건이었다.

<참고> 77년 수퍼월드컵 대회에서의 최동원


1978년부터 최동원은 대표팀의 실질적인 에이스가 되는데, 최동원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해이다.

78년은 최동원이 가장 빠른 공을 던질 때였고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157km까지 기록하면서 현지 언론에도 기사화 될 정도로 쿠바 리그와 미국 프로리그 투수들 외에는 최동원에 비교될만한 강속구 투수를 찾아보기 쉽지 않을 때였다.

8월에 네덜란드에서 열린 할렘국제야구대회에서 쿠바전에 구원 등판하여 3이닝을 완벽하게 막으면서 승리투수가 되는데, 이게 오히려 독이 되고 만다. 메이저 대회에서의 쿠바와 마이너 대회에서의 쿠바는 동일한 선수들이라도 완전히 다른 팀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1개월후 세계선수권에서 최동원은 쿠바전에 선발 등판해서 정말 호되게 당한다. 2이닝동안 무려 3개의 홈런과 2개의 안타를 허용하며 5실점 하면서 무너지는데,

쿠바에게 당한 경험은 최동원에게 전환점이 되었고 두 가지의 큰 변화가 있게 된다.

1. 세계 정상급 타자들을 제압하기 위한 오프-스피드 피칭의 중요성과 땅볼을 유도하는 구질의 볼배합을 절감하게 된다. 역회전볼과 다양한 커브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점점 노련한 투수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터득했다는 것이다.

2. 쿠바가 그랬던 것처럼 중요한 경기가 아닌 경우에는 자신의 진가를 전부 보여주지 않았다. 실제로 최동원은 국내의 주요 대회가 아닌 경기에서, 그리고 국제 경기에서도 메이저 대회가 아니면 단조로운 볼배합을 했기 때문에 홈런 등의 장타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추측이지만 최동원은 마이너 경기에서의 기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1980년은 장훈이 NPB에서 3천 안타를 기록했고, 동아일보가 창간 60주년 기념으로 롯데 오리온스를 초청한 해이다.

11월에 방한한 오리온스는 선수 구성에서도 주전 멤버들이 대부분 참가하는 등의 성의를 보였고 마무리 훈련 기간에 방한했기 때문에 경기 감각도 좋은 상태였다.

1991년 1회 한/일 수퍼게임에서도 드러났듯이 91년에도 한/일 야구의 수준 차이는 천지차이였다. 그런데 그 보다 11년 전인 1980년에 아무리 단일 팀이라고 해도 주전들이 참가한 일본 프로야구팀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도전으로 보였다. 더구나 당시의 오리온스는 퍼시픽리그 최강의 공격력을 갖춘 팀이었다(퍼시픽리그 2위팀).

한국 대표팀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고 오리온스가 투수력은 약한 팀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전력 투구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득점은 기대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오리온스 타자들이었다. 팀 타율이 2할 8푼이었고 홈런이 무려 180개가 넘는 그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어떻게 막느냐가 문제였다.





한국 대표팀에는 최동원이 있었다.

1차전에서 오리온스는 최동원에게 12개의 삼진을 포함하여 1:7로 완패의 수모를 당한다. 특히 장훈의 경우에는 정도가 훨씬 더 심했다. 2연속 삼진을 당하기까지 한다(3타수 무안타). 그나마 최동원의 공을 제대로 공략한 타자는 단 한 명 뿐이었고,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오치아이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신인이었기 때문에 비중있게 소개되지는 않았다(7번 타자).

1차전이 끝나고 한국 야구팬들은 일본 프로야구가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오히려 일본 사회인 야구 대표팀이 더 강팀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2차전에서 오리온스 타자들은 2회부터 홈런을 시작으로 황규봉, 김시진을 차례로 두들기며 4회까지 정확하게 8점을 득점하면서 승부를 결정짓는다. 전날 7실점 패배를 정확하게 8득점 하면서 갚았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추가 득점은 없었다.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힘을 과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한국의 야구팬들이 알루미늄 배트와 나무 배트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한국 야구에서는 구위라는 개념도 사실상 없었고, 배트 끝 부분이라도 제대로만 맞추면 어렵지 않게 안타로 만들 수 있었고 심지어 빗맞아도 안타가 될 확률이 높았지만 나무 배트로는 그게 안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위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최동원에게는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는 아마추어 선수들보다 나무 배트를 사용하는 프로 선수들이 훨씬 더 수월한 상대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지막 3차전에서 오리온스 선수들은 명색이 프로임에도 체면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1차전을 완투하고 단 1일을 휴식한 최동원이 또 등판했기 때문이다. 3차전은 더 이상 이벤트 게임이 아니었다. 올림픽 야구 결승전과 다를게 없었다.

3차전 선발 투수는 김용남이었으나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바로 4회부터 최동원이 구원 등판하게 된다. 완투승을 한 투수가 단 1일 휴식후에 또 등판했던 것이다. 수많은 국내/외 경기에서 그런 등판이 일상이었던 최동원이었지만 상대는 일본 프로야구 최강팀이었다.

한국은 5회말에 이해창이 1점 홈런을 치면서 리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6회초에 오리온스의 반격이 시작된다. 장훈의 우전 안타를 시작으로 연속 3안타로 무사 만루를 만들었으나 최동원의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으로 단 1실점만을 허용하면서 동점만을 허락했다. 그리고 팽팽했던 균형은 8회초에 깨지는데, 1사 이후에 내야 안타로 장훈이 출루하고 이어 병살 처리될 땅볼 타구가 실책으로 연결되면서 1사 1, 2루가 되었고, 적시타가 터지면서 오리온스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계속된 1사 만루에서 최동원이 2루타를 맞으면서 무너지게 되는데, 최동원을 무너뜨린 타자는 바로 오치아이였다. 실책 때문이었지만 오치아이를 만만하게 생각한 최동원의 실투였다. 결국 4:3으로 오리온스가 승리하게 된다.

사실 1980년의 최동원은 대학시절 중에서 가장 몸 상태가 나쁜 해였다. 계속된 국내/외 대회에서의 연투로 구속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국제대회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졌던 최동원이었지만, 이 해에 열린 세계선수권에서는 150km가 넘는 공을 거의 던지지 못했다. 국가 대항전은 아니었지만 한/일전이었다는 이유로 불가피하게 참가해서 안 좋은 몸 상태에서 또 연투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동원의 특별했던 커브, 그리고 뛰어난 제구력과 경기 운영 능력은 일본 프로야구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당연히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최동원은 즉시 전력감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참고> 최동원의 제구력과 경기운영 능력





1980년에 일본 프로야구에서 최동원을 스카웃 하려고 했다는 것은 현재와 비교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시에는 일본 프로야구에도 용병 제한 때문에 투수를 스카웃할 경우에는 무조건 에이스급 용도였고, 거의 대부분 트리플A 용병들이었다. 프로리그도 없는 한국의 대학생 투수를 오랜 역사의 일본 프로야구에서 에이스급으로 스카웃 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는 최동원이 고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해서 스카웃 시도를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최동원 또한 일본 프로야구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1년에 최동원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즉시 전력감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아시아 최초로 메이저리그 계약을 하게 된다.

<참고> 박찬호보다 극적이었던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






선동열은 국가대표 시절에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로부터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 특히 일본 프로야구는 선동열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선동열이 일본 프로야구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국보 투수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상당한 상품성을 갖춘 이후부터이다. 정확하게 1991년에 열린 한/일 수퍼게임부터이다.

1980년의 오리온스 초청 경기, 1991년의 한/일 수퍼게임 같은 이벤트 대회는 1차전이 가장 하일라이트이다. 베스트 멤버가 출전하기 때문이며 상징성도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1차전을 불과 몇 일 앞두고 선동열이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박동희가 선발 투수로 등판하게 되는데,


1980년 오리온스 초청 경기 2차전과 동일한 스코어가 나온 것이다. 문제는 경기 내용이었다. 설마 과거에 보여주었던 비참한 경기 내용을 또 보여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프로야구 역사가 10년이나 되었지만 경기력 차이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열린 2차전 경기 내용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심각했던 경기는 3차전이었다.


 


3차전에 출전했던 일본 올스타 멤버보다 더 약한 멤버로 팀을 구성하는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일본 올스타 팀이지 센트럴리그 꼴찌 팀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걱정했던 문제는 남아있는 경기가 아니었다. 한국 프로야구 92시즌이 더 큰 문제였다. 야구팬들이 프로야구를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그런데 한국 야구사에 남을 위대한 외교의 승리가 펼쳐지게 된다. 3차전이 끝나고 한국 선수단을 위해 마련된 환영 행사에서 모 간부가 NPB 관계자들에게 역사에 남을 명언을 날리면서 모든 난관을 한 방에 해결했던 것이다(9시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너무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 굴욕적인 사건에 대해서 한국의 야구인들과 올드팬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개탄했다.

"프로야구 역사가 10년이나 되었는데 최동원 같은 투수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위대한 외교의 결과로 한국 올스타팀은 4, 5차전을 화끈하게 이기는데, 좋은 일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는 말처럼 발목 부상에도 불구하고 국보 투수 선동열까지 자원 등판을 했던 것이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이만큼 다르다.

세계선수권에서 빈볼에 흥분하여 최동원에게 달려 들었던 쿠바 선수는
"그렇게 작은 투수가 어떻게 그런 경이로운 공을 던지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쿠바 대표팀 감독이 최동원에 대해서 했던 말 중에는
"아시아 투수들은 그런 커브 못 던진다. 최동원은 메이저리그 투수다."

한/미 대학야구에서 최동원을 두들겼던 미국팀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한국팀 덕아웃으로 찾아와 최동원에게 경의를 표하며 악수를 청했던 유명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최동원은 과거 국가대표 시절부터 쿠바, 미국을 상대로 비참하게 박살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 승부를 고집하면서 자기 자신을 시험했다.

그 결과 프로야구도 없던 시절에 이미 오프-스피드 피칭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땅볼을 유도하는 구질을 완성했을 정도로 선진 야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가 21세기 들어 시작한 야구를 최동원은 이미 70년대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선동열은 비참하게 박살나는 것을 너무 두려워했다. 사실상 유일했던 이 차이점이 선동열을 우물안 국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아버지의 MBC 인터뷰 증언


91년 한/일 수퍼게임에서의 굴욕은 한국 야구인들에게는 보약이 되었고 미국 야구를 적극적으로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젊은 감독들이 한국 야구를 이끌게 되었는데, 미국식 야구를 추구하는 젊은 리더들이 한국 야구를 이끌면서 95년에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90년대 들어 이광한 감독의 자율 야구를 시작으로 김인식, 김용희 감독이 이끄는 팀이 95년에 1, 2, 3위의 성적을 올리면서 한국 프로야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였고, 김인식 감독의 한국 올스타팀은 2회 한/일 수퍼게임에서 NPB 관계자들과 야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가장 상징적인 1차전의 영웅은 이상훈이었다. 최고 구속은 144km에 불과했지만 6.2이닝동안 5개의 탈삼진에 단 4개의 안타만을 허용하면서 무실점으로 대단한 호투를 했고, 9회에 마무리로 등판한 선동열은 최고 구속 150km의 강속구를 보여주었다.


91년 1회 대회부터 95년 2회 대회까지 한/일 수퍼게임에서 한국 올스타팀의 진정한 첫 승리는 2차전이었다. 선발 투수 조계현은 6.2이닝동안 4안타 2실점하면서 최초의 승리 투수가 된다. 특히 1회초 무사 만루에서는 단 1점만을 허용하는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8회초 1사 1, 2루의 위기에서 구원 등판한 선동열은 삼진과 플라이로 막아내면서 세이브를 기록하는데, 96년에 선동열이 일본에 진출하는데 있어서 가장 영향을 끼친 장면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선동열에 대해서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91년 1회 대회때는, 정확하게 따져서 선발 투수 시절에는 1차전을 앞두고 발목 부상을 당했는데, 95년 2회 대회때는, 이 또한 정확하게 따져서 마무리 투수 시절에는 왜 부상이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91년 선동열의 발목 부상은 부담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명품이 아니었다. 또한 알려진 것처럼 제구력이 완벽했던 투수는 더더욱 아니었다. 정확하게 따져서 영점 조준 피칭이었다. 일본 진출 첫 시즌에 고전했던 이유가 한국의 스트라이크존과 경계선이 달랐기 때문이었고, 동계훈련 기간 동안 일본 스트라이크존의 경계선 피칭을 익힌 후에 그 강력한 직구로 97시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자 1] 직구(144km) - 직구(144km) - 직구(142km) 3루타
[타자 2] 직구(145km) - 직구(143km) - 직구(143km) - 직구(146km) - 직구(145km) - 직구(144km) 삼진
[타자 3] 직구(146km) - 직구(147km) - 직구(145km) - 직구(147km) 땅볼

선동열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98시즌 영상이며, 노장 투수들이 하락세를 보일 때는 변화구 의존도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인 투구 패턴인 반면에 선동열은 직구 의존도가 심각할 정도로 높아지는 기이한 투구 패턴을 보여주었다.

<참고> 선발 투수 선동열은 특급 에이스가 아니었다.


인터넷에는 선동열의 슬라이더가 대단한 명품이었고 경이로운 수준의 결정구로 알려져 있으나 막상 실전 경기에서, 특히 중요한 경기에서의 슬라이더 구사 비율은 심각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알려진 것처럼 선동열은 슬라이더의 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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