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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에서 최악의 사면초가였던 1984년의 선동열 jun970616


출처> 野生野死 야구에 죽고 사는 .. | jun970616


84년에 선동열은 국내/외 경기에서 6이닝 이상 던진 경우가 거의 없다.

1회에 조기 강판당하기도 했고, 일본전만 해도 85년 1월 아시아선수권을 포함해서 5이닝, 5이닝, 4이닝만에 강판당하면서 2연패 하는 등, 이닝이터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84년 한미대학야구에서도 나오자마자 강판, 세계선수권에서도 6이닝, 6이닝, 5이닝에 그친다.

그런 선동열을 캐나다 출신이라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터가 슬라이더까지 언급하면서 자세하게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고 LA올림픽 캐나다전에서 선동열 등판여부는 알 수 없으나, 나왔던들 수십년 지난 상황에서 구질까지 언급하며 기억했을까 싶을 정도의 인상적인 호투 보여줬을 가능성도 적다.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었던 김청옥은 한국팀 패전 책임을 선동열에게 돌려 선동열이 지금도 이를 갈고 있는데 캐나다 대표였다는 스카우터가 지금까지 그렇게 세세하게 선동열을 기억한다고?



윌슨은 지난 1984년 LA 올림픽 때 캐나다 대표로 출전해 당시 한국 대표팀이었던 선동열
감독의 투구를 처음 접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월슨은
"나는 LA 올림픽 때 선감독의
투구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아시아에 이런 투수도 있나 싶었다"
며 추억을 돌이켰다. 



프로에 입단하기 직전인 84년에 선동열은 국내/외 대회에서 수세에 몰린다.

84년 춘계리그에서는 무려 3경기를 조기에 강판 당하는 수모를 당하는데, 선빠들은 숫자 개념 약하므로 구체적 설명을 해주겠다.

82년 2관왕인 고려대도 그 해 16승 3패로 19경기에 그쳤지만 선동열 당시 대학팀들은 1년에 고작 10경기 조금 넘거나 강팀도 20경기 넘기기 어려운 경기를 치렀다.

대회수는 선동열 1학년때가 6개, 2학년때부터 5개. 1년 5개 대회에서 총 20경기 이하 치루는 대학리그에서 국가대표 에이스가 한 대회에서만 3경기나 조기 강판 당했다는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84년 춘계리그 선동열 조기강판 경기

84년 3월 26일 춘계리그 동아대전 2/3이닝 3안타 2실점 패전
84년 4월 1일 춘계리그 한양대전 1회 1실점후 강판
84년 4월 2일 춘계리그 연세대전 4회 7안타 2실점 강판


동아대전에서는 1회를 못 넘기고 강판, 선동열에게 약했던 연세대전에서 마저 4회를 못 넘기고 7안타를 두둘겨 맞고 강판 당한다.

그런데 이때 대학 타자들 선동열 공략하는 걸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스트라이크존을 좁혀 최대한 볼넷 많이 얻어내고 배트 짧게 잡는 타법으로 부족한 파워 보충하며 선동열로 하여금 많은 공 던지게 하여 조기강판 시킨 것이다.

이런 영리한 공략에 선동열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알루미늄 배트가 아니라 나무배트였다면 이런 공략법도 효과가 없었겠지만 알루미늄 배트 위력에다 변화구 구사 능력이 떨어지는 선동열로서는 스트라이크존을 좁히고 배트 짧게 잡고 덤벼드는 대학 타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략 패턴은 같은 동양권인 일본 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홈에서 고전하며 승리한 82년 세계선수권 이후 선동열은 3경기 연속 일본전에서 조기 강판되었고 84년 LA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는 2연속 패전을 당했으며, 프로입단 직전에 벌어진 85년 1월 아시아선수권에서도 패전 직전까지 갔다가 김기범 덕분에 패전을 모면하는 망신을 당한다. 이때 일본 타자들 역시 볼넷을 고르며 배트 짧게 잡고 단타 위주 타법으로 선동열을 괴롭혀 3연속 조기강판 수렁으로 몰아넣는다.


반면 미국은?

첫 대결이었던 82년 세계선수권 이후에 선동열이 미국전에서 보여준 경기 내용은 일시적인 난조가 아니었다.

우선 미국대표팀은 우리와 달리 해마다 멤버가 전부 바뀌는데 선동열은 83년 한미대학야구 2차전에 구원으로 나와 호투를 한다. 선빠들 이거 하나 가지고 우려먹는데 차라리 이 호투한 경기가 두번째 대결 아닌 이후에 나왔으면 부진한 경기가 컨디션 난조라고 변명이 되겠지만 이후에 한 번도 호투나 승리 없는 선동열의 한계를 보여준다.

결국 선동열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한 미국 대학선수들은 4차전에 5대 1로 앞선 한국팀 승리 지키기 위해 7회 등판한 선동열을 바로 난타하여 8회에 김건우로 교체되게 만든다. 이후 한국팀은 84년 대회까지 매경기 대패하며 겨우 1경기를 이기는데, 오명록과 윤학길이 계투한 경기였다.

이후에 선동열이 등판한 기록은 84년 한미대학야구 6차전에 나오는데 선동열을 포함하여 5명의 투수들이 나와서 7회 콜드로 9대 1로 대패하는데 당시 7이닝동안 2이닝 빼고 매이닝 실점이라 어느 시점에 선동열이 나왔건 난타당한 것은 확실하다.

메이저리그에서 선동열에게 관심 가진 기사는 전부 84년 한미대학야구와 LA올림픽 기간 걸쳐 주시한게 전부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당시 선동열이 한미대학야구와 LA올림픽에서의 투구가 기대이하인 것과도 귀결된다.


1984년 7월 2일 동아일보

84년 한미대학야구 선수권에서 미국이 4승 1무 1패로 승리했다. 한국팀은 2일 새벽(한국시간) 신시내티에서 열린 미국과의 6차전 마지막 경기에서 1대 9로 대패했다고 선수단이 알려왔다. 윤학길을 선발로 선동열을 포함 6명의 투수를 내세운 한국은 미국에 4개의 홈런등 13개의 안타를 허용했다.(중략)


이 경기를 두고 일부 선빠들은 선동열은 무실점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우기지만 보다시피 7회 시간제한 콜드로 끝난 이 경기에서 미국팀은 거의 매이닝 득점하고 있다. 이닝당 실점 상황 보면 알겠지만 한국팀 투수가 6명 나오고 선동열도 그 중 하나인데 선동열이 이 상황에서 호투가 가능하다고 보나?





결국 선동열이 어느 시점에 나왔건 난타당하고 물러난 것은 확실하다. 1:9에서 마지막 7회에 선동열이 나와 1이닝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면 그게 바로 선빠!

나오자마자 강판당하는 선동열을 보고 다저스 스카우터가 참 감동했겠다.

<참고> 선동열의 메이저리그 오퍼/계약 외신 뉴스


한미대학야구는 메이저 대회 앞 둔 한국팀 전력 평가로 중요한 대회이고, 이 대회에서 호투한 투수들은 그 해에 미국전 선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박동희, 정민태 등).

미국팀 타자들에게 두 번째 대결 이후에도 호투 못 보여준 것은 선동열의 변화구 한계 때문이었다. 최동원이 78, 80, 81년 3대회 연속 미국전에서 호투할 수 있었던 것은 낙차 큰 커브가 있었기 때문인데, 낙차 큰 변화구가 없는 선동열은 84년에 슬라이더를 완성하였으나 리치가 긴 파워 있는 미국 타자들한테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동양권인 일본 타자들만 해도 배트 컨트롤로 선동열의 슬라이더에 그렇게 당하지 않았다.


선동열이 미국 타자들에게 약했던 것은 이후 경기에 그대로 반영된다.

LA올림픽때 김청옥 감독은 파워 약한 일본, 대만전에만 선동열을 내보냈고 84년 세계선수권때 한을룡 감독은 예선 2경기에 선동열을 내보낸 후 결선리그 7경기 내내 선동열을 벤치에만 앉혀놓고 고민하게 된다.

아무리 봐도 파워 강한 미국, 쿠바전에 승산 없다고 판단한 한을룡 감독은 고민 끝에 선동열을 일본전 선발로 등판시키나 결과는 1이닝 2볼넷 4연속 안타를 맞는 난조 끝에 3실점하고 패전투수가 된다.

당시 한국은 투수력이 고갈되어 매경기 완패 당하는 최악의 상황인데도 감독에게 불신 받은 선동열은 7경기 중 겨우 한 번만 선발로 나오고 그 대회 한국팀은 12경기를 치렀는데 선동열의 투구 이닝은 20이닝도 채 안된다.

이게 당시의 선동열이었으나 다행히 프로에 입단하여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타자들과 대결하고 악몽 같았던 알루미늄 배트와 이별하면서, 그리고 기형적으로 좌/우가 넓었던 KBO의 스크라이크존에서 어이없는 전성기가 시작된다.

<참고> 선발 투수 선동열은 특급 에이스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