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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에게 사용되는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는 정당한가? 반론


선동열에게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가 최초로 사용된 시점은 86년이었다.

86년 - 39경기 24승 6패 6세이브 262.2이닝 (0.99)


24승 262.2이닝 0.99 방어율 때문에 선동열이 국보급 투수라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위대한 기록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불과 1개월만에 의심을 받게 된다. 그 시절 야구팬들이 아무리 무지했어도 최소한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는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6년 9월에는 아시안게임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프로야구 정규시즌은 조기에 종료되었다. 선동열은 9월 13일 청용전(7이닝 구원승)을 마지막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10월 19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등판하는데,

무려 35일간의 넉넉한 휴식에도 불구하고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한다. 1차전에서는 9이닝 3실점을 했고, 4차전에서는 6이닝 2실점을 하면서 패전 직전까지 갔으나 팀 타선의 도움으로 겨우 패전을 면하게 된다.

상대팀이었던 삼성은 선동열이 선발 등판한 경기(1, 4차전)를 다 잡아 놓고도 연장전에서 역전패를 당하는데, KBO가 새롭게 적용한 몰상식한 제도 때문에 종합승률 1위를 했음에도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5차전 내내 두산과 피말리는 접전을 벌였고, 단 1일 휴식후에 시작된 한국시리즈에서 누적된 피로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다 잡은 경기를 놓쳤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진짜 실력은 포스트시즌 기록


한국시리즈 이후에 84년 최동원보다 떨어지는게 아니냐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많은 야구팬들이 그러한 평가에 주목하게 된다. 80년대 가장 치열했던 시즌이 84년이었고, 더구나 84년 롯데는 막장팀이었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막장팀 롯데에서 27승을 기록한 반면 선동열은 삼성과 함께 최강팀이었던 86년 해태에서 24승을 기록했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4승으로 막장팀 롯데를 우승시켰다는 점에서 야구 이해도가 떨어졌던 당시 야구팬들도 투수의 여러 기록들 중에서 방어율이 진정 신뢰할만한 기록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방어율이 가상수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구는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이고, 가상수치(방어율)보다 실적(이닝+승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동열에게 87시즌은 정말 중요했다.

87년 - 31경기 14승 2패 6세이브 162이닝 (0.89)


87년 기록을 대충 보면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세부 내용을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던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가, 더구나 이닝이터 평균이 200이닝이 넘었던 시절에 고작 162이닝을 던졌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등판일지와 구원승 내역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록이었다.


14승 중에 무려 9승이 구원승이었다. 그리고 8, 9월에 구원승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4월에 7경기, 5월에 4경기, 6월에 1경기, 7월에 3경기, 8월에 4경기, 그리고 9월 2일부터 10월 2일까지 시즌 후반기에만 무려 12경기에 등판하여 (여름내내 푹 쉬고 9월부터) 지쳐있는 타자들을 상대해서 그럴듯한 기록만을 남긴 시즌이 87년이었다.

87년 등판일지가 6월부터 한심해진 이유는,  5월 16일에 그 유명했던 최동원과의 연장 15회 마지막 맞대결 이후에 뻗었기 때문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최동원과의 맞대결 관련 내용이 파렴치한 선빠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 최동원, 선동열 맞대결이 원래 4차전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은 3차전(10월 10일) 1:1에서 8회 1사 1루에 구원 등판하여 1볼넷과 1안타를 허용하고 강판당했고(0이닝 2자책점), 한국시리즈에서는 2차전(10월 22일)에 등판하여 1.2이닝 세이브를 기록한 것이 87년 포스트시즌 기록의 전부였다.

시즌 막판에 그럴듯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 무리한 등판을 했고,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던 10월 3일 빙그레전에서 5이닝을 던진 이후에 6일간의 휴식은 선동열에게 턱없이 부족한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87년 포스트시즌 이후에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는 사실상 폐기된다. 하지만 88년에도 해태팬들과 언론의 선동열 찬양에는 변함이 없었다. (87년 대통령선거 이후에) 해태팬들에게 선동열은 이유 없는 희망이었고, 따라서 언론에게 선동열은 전략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88년 - 31경기 16승 5패 10세이브 178.1이닝 (1.21)


88년부터 해태는 독보적인 강팀이 되었고, 그래서 선동열의 88년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독보적인 강팀에서도 여전히 선발 10승이 불가능했고 200이닝(80년대 이닝이터 평균) 투구가 불가능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긴 있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완벽한 피칭으로 최초의 선발승을 기록했던 것이다(7.1이닝 무실점).

9월에는 88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즌이 조기에 종료되었고, 선동열은 8월 25일 두산전(6이닝 구원승) 이후에 10월 19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등판했다. 무려 54일간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선동열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선동열이 해태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6년동안(86 ~ 91년) 무려 8번의 포스트시즌 시리즈에서 2번이상 선발 등판한 시리즈는 86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했고(1, 4차전), 완벽한 피칭으로 선발승을 기록한 시리즈는 88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했다. 무려 1개월 이상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의 야구팬들이 믿기 힘들겠지만, 선동열은 80년대 KBO에서도 4일 휴식 로테이션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88년은 선동열이 기껏해야 15승 투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시즌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승수가 중요한 이유는,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던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당연한 실적이었지만, 하위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추세(최강팀 에이스가 이닝이터 평균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는 15승 투수)가 계속되었다면 언론에서 아무리 뻥튀기를 해도 현재의 야구팬들은 선동열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84년부터 87년까지 최강팀이었던 삼성의 에이스 김시진의 기록을 보더라도,

(84년) 215이닝 19승 - (85년) 269.2이닝 25승 - (86년) 196.2이닝 16승 - (87년) 193.1이닝 23승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당연한 실적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선동열은 86년 반짝 활약 이후에 88년까지 평범한 에이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89년에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

89년 - 36경기 21승 3패 8세이브 169이닝 (1.17)


169이닝을 던지고 어떻게 21승이 가능했단 말인가? 일단 구원승 내역부터 보자.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89년에도 선동열은 여전히 선발 10승이 불가능한 투수였지만, 구원승의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20승 투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강철이 해태에 입단하면서 선동열에게 구원승의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선동열 - 36경기 21승 3패 8세이브 169.0이닝 (1.17)
이강철 - 36경기 15승 8패 5세이브 195.1이닝 (3.23)



이렇게 되면 도대체 누가 에이스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 진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선동열에게 절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스포츠 언론에 흥미로운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 유명한 "선동열은 애기야 애기"


[프로야구 주간방담] 1990년 3월 14일 스포츠서울

하와이에 전훈중인 쌍방울은 어린이 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탄 것과 같은 짜릿한 추억을 안게 됐습니다. 지난 6일 하와이 대학과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동국대 감독 시절 미국 대학팀들과 게임을 해 보았던 김인식 감독은 "그까짓 단일대학 쯤이야..." 했는데 엉뚱하게도 뉴욕 메츠의 선발 투수 시드 페르난데스가 선발로 올라온 겁니다. 페르난데스라면 지난해 14승 4패로 팀내 최고 성적을 올렸던 투수로 마침 미 프로야구가 '직장폐쇄'중이어서 모교에서 훈련중이었습니다. 결과는 3회까지 무안타 5삼진. 우선 덩치(185cm 104kg)에 놀라고 스피드에 놀란 김감독은 "선동열은 거기에 비하면 애기야 애기"라고 혀를 내두릅디다.


그렇다면 선동열은 90시즌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90년 - 35경기 22승 6패 4세이브 190.1이닝 (1.13)


이닝이터 평균 이닝수에 근접하는 변화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승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닝수만 늘어났을 뿐이지 세부내역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로테이션이었다. 컨디션이 좋을 때만 등판하다 보니 로테이션을 지킬 수가 없었고, 구원승 비중을 줄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에이스들의 구원승 비중이 높은 이유는, 선수층이 부실했기 때문에 에이스들이 불규칙적인 등판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정규시즌 경기수에 비해 출전 경기수와 이닝수, 그리고 구원승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사를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최강팀 에이스였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만 등판했으니 이닝수는 미달일 수밖에 없었고, 구원승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발승 - 이닝수 - 방어율]이 기형적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동열 - 35경기 22승  6패  4세이브 190.1이닝 (1.13)
이강철 - 44경기 16승 10패 5세이브 220.2이닝 (3.14)



이강철과의 기록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89, 90시즌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선동열이 아니었다. 당연히 언론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태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이강철!" 이에 자극을 받은 선동열은 91년에 진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91년 - 35경기 19승 4패 6세이브 203이닝 (1.55)


선동열 커리어에서 가장 에이스다웠던 시즌은 91년이 아닌가 싶다. 선발승이 15승이었고 이닝이터 평균 이닝을 소화하면서 방어율도 훌륭했다. 91년은 선동열 커리어에서 가장 정상적인 기록이 만들어진 시즌이었다.


사실 선동열의 86년 기록도 문제가 많았다. 부실한 선수층에서 7구단(빙그레)이 창단되면서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고, 전/후기리그 방식의 경기일정은 강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각 리그 후반(6, 9월)에는 포스트시즌 진출 경쟁에서 탈락한 팀들의 경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상위팀 투수들은 비교적 쉽게 승수를 올릴 수 있었고, 기록 관리에서도 월등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86년 선동열의 3연속 완봉승 기록도 9월에 경쟁에서 탈락한 팀을 상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하위팀 투수들은 기록에서도 말도 못하게 손해를 보았다.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방어율 관리는 꿈도 못 꾸었다.

<참고> 1986/87년의 특급 에이스 선동열


만약 선동열이 에이스로 활약한 6년동안(86 ~ 91년) 선발승 15승 이상, 200이닝 이상 투구, 1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유지했다면 누구도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동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선동열은 이강철이 해태에 입단하기 전까지 최강팀에서 구원승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15승 투수에 불과했고 이닝수는 미달이었다. 이강철 덕분에 일시적으로 20승 투수로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2시즌(90~91년) 연속 무리한(?) 투구를 하면서 선발투수 생명도 끝나게 된다.

선동열이 96년에 NPB에 진출해서 고전했던 이유는, NPB 수준이 월등히 높아서 KBO 역대 최고 투수가 고전한 것이 아니었다. 선동열은 KBO 역대 최고 투수도 아니었고, 최강팀에서 방어율에만 집착하는 몰상식한 야구만 하다 반대의 환경에서 실체가 드러난 것 뿐이었다.




[ 주간야구 88년 9월 14일(수) 발행 ] 선동열(만 25세) 인터뷰 중에서



그리고 선동열이 있었기 때문에 해태가 우승을 많이 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잘못 되었다. 선동열이 해태 우승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에이스로 활약한 기간동안(86 ~ 9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기여도는 미미한 수준이었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있어서도 86년을 제외하면 비중있게 기여한 시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선동열이 NPB에 진출한 이후에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이종범은 해태를 2년 연속(96~97년) 우승으로 이끌면서 선동열의 해태가 아니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선동열 없이도 해태는 얼마든지 강팀이었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아버지의 MBC 인터뷰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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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선동열 맞대결이 원래 4차전이었다? 야생야사



[최동원-선동열] 맞대결을 다룬 기사에서 아래 내용은 오류와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다.


숨겨진 또 다른 맞대결, 1987년 4월 12일 혈투

지금껏 알려지기로 최동원-선동열 맞대결은 3차전에서 끝을 맺었다. 역대 전적 1승1무1패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기록으로 기억돼 있다. 그러나 두 투수의 숨겨진 맞대결은 하나가 더 있었다. 1987년 4월 12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태-롯데전이었다.

이날 롯데 선발은 최동원, 해태 선발은 고 김대현이었다. 전주고-원광대를 졸업한 프로 2년 차 김대현은 당시 무명 투수였다. 1986년 데뷔 첫해 2패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하지만, 김응룡 감독은 그런 김대현을 “싹수가 보이는 투수”로 평가하며 1987년 스프링캠프 때부터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최동원과의 맞대결에 김대현을 내보낸 것도 “대투수와 붙어야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김응룡 감독의 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김대현은 1회 1사를 기록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유가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김대현의 팔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선발투수는 최소 한 타자 이상을 상대하고 물러나야 했기에 김 감독은 김대현이 1아웃을 잡자 곧바로 투수를 바꿨다. 문제는 바뀐 투수가 선동열이라는 데 있었다.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한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른 선동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선동열을 지켜보는 관중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응룡 감독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선발투수는 이미 소진된 후였고, 롱릴리프로 등판할 투수라곤 선동열밖에 없었다.

....................
[ 2011년 12월 23일 기사에서 발췌 ]


먼저 오류 부분부터 지적하자면,

(오류) 두 투수의 숨겨진 맞대결은 하나가 더 있었다. 1987년 4월 12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태-롯데전이었다.
(정정) 두 투수의 숨겨진 최초의 맞대결은 1985년 7월 31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태-롯데전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85년 7월 26일 광주에서 벌어진 [롯데 - 해태]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날 선동열은 재일동포 김정행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0:3으로 완투패를 기록한다. 그리고 4일 휴식후인 31일에 부산 롯데전에 선발로 등판해야 하는데,

등판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최동원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85년 롯데는 공격력이 무려 3~4위권 수준이었다(6개팀). 최동원이 롯데에서 활약한 기간동안 가장 강력했던 롯데가 바로 85년 롯데였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다. 후기리그 7월 30일까지 롯데는 14승 5패로 1위였고, 해태는 10승 12패로 5위였기 때문이다.

김응룡 감독이 고심했었다는 정황이 31일 경기에 그대로 드러난다. 오히려 페이스가 떨어져 있는 강만식을 선발 등판시켰고, 2회까지 호투하던 강만식은 3회에 제구력 난조로 1사 만루 위기를 자초하면서 선동열에게 공을 넘기게 되는데,


선동열은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면서 3실점했고, 6회에 추가 1실점을 하면서 5.2이닝 4실점 1자책점을 기록한다. 주목할 점은 4일 휴식 등판이었다는 사실이다. 80년대 KBO에서 4일 휴식은 충분한 휴식이었고, 따라서 선동열의 패전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선동열은 선발로 등판했어야 했고, 6회에 선동열의 자책점이 존재하며 해태가 6회까지 무득점이었다는 점에서, 4점차로 벌어진 이후에 해태가 7회에 득점한 2점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기사 제목을 포함하여 오류 부분은 정정되어야 한다.


최동원-선동열 맞대결, 원래 5차전이었다.

숨겨진 두 개의 맞대결, 1985년 7월 31일과 1987년 4월 12일

지금껏 알려지기로 최동원-선동열 맞대결은 3차전에서 끝을 맺었다. 역대 전적 1승1무1패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기록으로 기억돼 있다. 그러나 두 투수의 숨겨진 맞대결은 두 개가 더 있었다. 1985년 7월 31일과 1987년 4월 12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태-롯데전이었다.



그리고 거짓으로 구성된 부분을 지적하자면,

(여기부터) 최동원과의 맞대결에 김대현을 내보낸 것도 “대투수와 붙어야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김응룡 감독의 배려 때문이었다.
.................... 선발투수는 이미 소진된 후였고, 롱릴리프로 등판할 투수라곤 선동열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위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겠으나, 당시의 정황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김응룡 감독의 "꼼수"였다. 선발투수는 처음부터 위장이었고, 선동열의 등판은 계획되어 있었다.

그 시절 야구팬들 수준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21세기에 그런 꼼수를 썼다가는 평생 들을 비난의 절반 이상을 하루에 다 듣게 될 것이다. 왜 그런지 87년 4월로 돌아가보자. 12일까지의 선동열 등판일지와 해태 경기(일정/전적)에서 진실을 유추할 수 있다.


87년은 7개구단이었고 7일(화), 8일(수)에는 해태 경기가 없었다. 9~10일에는 광주 청용전, 그리고 11~12일에는 부산 롯데전이 예정되어 있었고 13일은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경기일정이 없었다.

4월 9일 광주 청용전에서 선발 차동철이 5.2이닝을 던지고 승리 투수가 되었고, 선동열은 3.1이닝을 던지고 세이브를 기록한다. 선동열의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고, 5일 광주 삼성전에서 5.1이닝 구원승을 거둔 이후였다. 그리고 해태는 10일에 시즌 첫 패배를 기록한다.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9회까지 1:1의 투수전이었고 11일 선발 예정이었던 김정수가 9회에 등판해서 2이닝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4월 개막이후 9일까지 3연승을 달리던 해태는 3일간(6~8일)의 충분한 휴식이 있었고, 10일 첫 패배 이후에 11일 롯데전에서 0:11로 대패하면서 3연패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13일은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경기일정이 없었다.


휴식일 전날, 3연패 직전의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김응룡 감독의 이런 배려가 가능했을까?
최동원과의 맞대결에 김대현을 내보낸 것도 “대투수와 붙어야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김응룡 감독의 배려 때문이었다.

김응룡 감독은 스케일 큰 야구를 추구했던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변칙에 능했고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경기시작 1시간 전에 오더를 교환하는데, 경기를 앞두고 김대현의 팔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는 건, 선동열은 이날 경기 이후에 19일 경기에 등판했고(6일 휴식), 팔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던 김대현은 15일 빙그레전에서 10:2로 리드하던 7회에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14일 경기는 팽팽한 투수전이었고 연장 10회에 빙그레가 해태를 3:2로 이겼다(김대현이 등판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었다).

정리하자면, 12일 경기에서 오더교환 직전까지 이상이 없었던 김대현은 경기 시작 전에 급격히 팔 상태가 나빠졌고, 13일 휴식일 다음날(14일) 경기는 팽팽한 투수전이었으며, 15일 경기에서 10:2로 리드하던 7회에 김대현이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정황증거가 가리키는) 진실은 다음과 같다.

시즌초에 3연패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3연승 이후의 3연패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다음날(13일)은 경기일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김응룡 감독은 선동열을 필승 카드로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4월 5일 5.1이닝 구원승 (3일 휴식) 4월 9일 3.1이닝 세이브 (2일 휴식), 개막이후 8.2이닝 투구가 전부였고 80년대 KBO에서 에이스의 등판 일정으로는 조금도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4월 12일 경기의 선발 투수는 선동열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반드시 이기겠다는 김응룡 감독의 의지는 "꼼수"를 발휘하게 하였다.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선동열은 선발 등판에 맞춰서 이미 워밍업을 끝낸 상태였을 것이다(당시 사직구장은 불펜이 노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팀에서 파악이 불가능했다).

물론 김대현이 87년 해태의 주력투수들 중 1명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점은 5월 이후이다. 그러므로 기사에서 이 내용이 진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한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른 선동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거나 김응룡 감독의 전략인지 꼼수인지는 적중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상대팀 선발의 오버페이스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 87년 4월 13일 경향신문 ]



최동원은 4회까지 포볼 1개만 허용했을뿐 무안타로 호투했으나 5회초 집중 3안타를 맞으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현재에 와서 그 어떤 주장을 하든,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의 정황은 이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꼼수"

개막이후 3연패였던 롯데는 3연승 직전에서 그 "꼼수" 덕분에 상승세가 꺾이면서 바닥까지 추락하게 된다(5월 1일 / 5승 12패). 그리고 5월 16일, 그 유명했던 [최동원-선동열]의 연장 15회 맞대결 이후에 상승세를 타며 종합승률 3위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

선동열은 혈기왕성한 만 22세 ~ 24세때 최동원을 상대했다. 84년 혹사로 한 물간 85년 이후의 최동원을 상대하면서도 5번의 맞대결에서 2번이나 비겁한 등판을 했다. 그렇다면 84년 최동원을 상대했다면 선발 맞대결이 존재할 수나 있었겠나?


"올 시즌 첫 황금팔 대결에서 선동열이 최동원에 판정승을 거뒀다."

김응룡 감독의 꼼수가 부각될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기자들 수준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비겁한 "꼼수"를 판정승이라고 기사를 쓰는 수준이었으니 야구팬들 수준도 바닥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과거 투수들의 실전 투구를 본 적도 없는 현재의 야구팬들이 기록만 보고 단일 시즌 최강 임팩트가 83년 장명부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 83년 장명부는 알려진 것처럼 엽기적인 투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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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박철순, 83년 장명부와 이상윤, 84년 최동원 컬럼


82년에 KBO가 출범했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은 대한야구협회와의 갈등이었다. 실업야구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의 KBO 출범은 선수 수급에 어려움이 있었고, 지역 연고제 선수 구성 방식을 고수한 KBO의 정책은 (추측이지만) 현대와 금호가 이탈하는 원인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 대구/경북 지역은 고교 야구의 전성기였고, 이 선수들을 흡수할 수 있었던 삼성과 서울의 청용은 엔트리 구성에 문제가 없었으나 다른 지역은 문제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인천과 광주는 심각했다. 15명 확보도 어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지식인들로부터 (전두환 정부)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라는 오해까지 받았기 때문에 야구인들 조차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참고> 81년 8월까지 프로야구(KBO) 출범 계획은 없었다.


그 때문에 82년 우승은 삼성과 청용이 다툴 것으로 전망되었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82년 개막전이 [삼성 - 청용]인 이유이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던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 더블A 출신 박철순의 등장으로 중위권 전력의 두산이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82년은 80경기 일정이었고 전/후기리그 각각 40경기였는데, 박철순은 전기리그에서 3월 28일 첫 등판을 시작으로 6월 22일 마지막 등판까지 23경기에 등판하여 18승 2패 3세이브, 17연승의 경이로운 성적을 거두며 두산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도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팀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불규칙적인 연투는 단 1년만으로도 선수생명을 끝나게 할 수 있는데, 박철순은 전기리그 내내 불규칙적인 등판을 반복했고, 결국 허리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후기리그에서는 여유있는 등판을 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이어진 한국시리즈에서 또 무리를 하면서 200이닝 투구를 기록한 시즌은 82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다.

83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욕은 무리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이어졌고, 박철순의 허리부상은 심각한 상태가 된다.




박철순의 등장으로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중위권 전력의 두산이 82년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변은 83년에도 이어지는데, 그 중심에는 장명부가 있었다.

추측이지만, 장명부는 두 가지 착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 NPB 에이스 출신인 자신(장명부)이 더블A 출신 박철순보다 기량면에서 월등하다는 착각
2. 박철순이 40경기에서 18승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자신(장명부)은 50경기에서 20승이 가능하다는 착각



장명부는 4월 3일 첫 등판을 시작으로 5월 26일까지 31경기에서 17경기에 등판하여 13승 3패 1세이브를 거두었고, 남은 19경기에서 9~10경기에 등판하여 +7~8승이 가능한 20~21승 페이스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5월 26일 해태전이었다.

해태는 1위 삼미와 1경기차였고, 그래서 광주 홈경기는 해태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해태는 경기 초반에 6실점을 하면서 장명부의 무난한 승리로 예상되었다. 83시즌 최고의 명승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팀 모두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더구나 5월 들어 도저히 공략 불가능해 보이던 장명부를 놀랍게도 해태 타자들이 공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기 중반부터 2득점, 2득점, 그러더니 8회에 1점을 추가하면서 5:6까지 따라 붙었던 것이다.

중계방송을 KBS1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9시 뉴스 때문에 중계방송이 중단되자 방송국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인지 KBS2에서 중계방송을 계속하게 되었고(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전파사 TV 앞에 묶여 있었다),

해태가 9회말에 6:6 동점을 만들면서 야구팬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해태는 10회초에 실책으로 자멸하게 되는데, 중요한 사실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장명부가 맞아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기리그 남은 경기에서 9~10경기에 등판하여 +7~8승이 가능했던 장명부의 페이스는 이 경기 이후에 급격한 하락세을 보이면서 9경기에 등판하여 +4승에 그친다. 결국 해태는 30승 1무 19패로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삼미는 27승 23패로 2위를 하는데,

만약 장명부의 최초 계획대로 20승 이상을 했다면 해태의 승/패에도 최소한 1경기는 영향을 끼치므로 해태는 29승 1무 20패로 2위, 삼미는 30승 20패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명부는 무엇을 착각했나?

1. NPB 에이스 출신인 장명부는 더블A 출신 박철순보다 기량면에서 한 수 아래였다.
2. 박철순은 40경기에서 18승이 가능한 기량이었지만 장명부는 50경기에서 20승이 불가능한 기량이었다.



박철순이 18승이 가능했던 원동력은 한국 타자들이 82년 내내 박철순에게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장명부 상대로는 익숙해질 수 있었고 공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기량차이였다.

박철순의 주무기(포심/커브/팜볼)는 타이밍이 전부 달랐고, 임기응변 능력이 떨어지는 한국 타자들이 1년 이내에 적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장명부는 후기리그에서 전략을 바꾸게 된다. 해태 이상윤이 전기리그에서 사용한 전략이었다.


개막이후 2패만을 기록했던 이상윤은 4월 21일에 첫 승을 올린 이후에 5월 25일에 완봉승을 거두면서 6승 5패 1세이브로 해태의 에이스로 부각되었고, 이후부터 김응룡 감독은 리드하거나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는 무차별적으로 이상윤을 등판시키는데,

5월 31일 구원승을 시작으로 6월 22일 완봉승을 거두면서 해태의 전기리그 우승을 사실상 확정짓는데, 이상윤은 불과 23일동안 9승 1세이브를 기록한다(4월 21일 첫 승을 시작으로 6월 22일 마지막 완봉승까지 63일동안 15승 5패 1세이브).


[ 83년 6월 21일 경향신문 ]



"위에서 떨어지는 드롭볼과 스피드는 국내 최고" (드롭볼은 포크볼을 의미하는 당시 표현이다.)


83년 이상윤의 구위는 대단했고, 기사에는 "150km를 능가"한다고 나왔지만 정확한 스피드는 알 수 없다. 당시 스피드건으로 결정구 스피드는 145km에서 형성되었고 현재 사용되는 공식 스피드건으로는 140km 중/후반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시리즈에서도 6일동안 3경기에 등판하여 20이닝을 던졌고 1승 1세이브로 팀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박철순과는 달리 이상윤은 2년연속 무리한 투구를 하는데(40경기 이상 등판 + 200이닝 이상 투구), 그로 인해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면서 평범한 통산 기록을 남기게 된다.


시즌을 앞두고 전문가들의 예상에 이런 표현이 많이 사용되는데, [ 2강 3중 2약 ] 여기서 현재의 "중"의 의미와 KBO 초창기의 "중"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KBO 초창기의 "중"은 우승이 불가능하다는 "약"의 의미이다.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해태는 82년에만 하위권 전력이었고, 83 ~ 85년은 중위권 전력, 86/87년은 삼성과 함께 최강팀 전력이었다. 그리고 88년부터 독보적인 최강팀이 된다. 이상윤의 통산 기록에서 80년대 KBO의 전력 불균형이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84년에 이상윤은 무려 40경기에 등판하여 211이닝을 던졌으나 겨우 10승을 기록했다. 해태가 강팀이 된 86년에는 21경기에 등판하여 115이닝을 던지고 10승을 기록했고, 독보적인 강팀이 된 88년에는 30경기에 등판하여 137이닝을 던지고 무려 16승을 기록한다.

또 다른 사례로 김시진, 임호균이 있다. 이닝이팅 능력에서만 김시진이 월등했고 기량면에서는 사실상 동급의 투수였다. 그런데 이런 두 투수가 KBO 출범 이후에 한 명은 강팀에서 또 다른 한 명은 약팀만을 전전하게 된다(김시진, 임호균의 83 ~ 87년 기록).


  


85년 김시진의 25승, 86년 선동열의 24승은 가치있는 기록이 아니다. 중/하위권 전력의 팀에서는 15승도 불가능했다. 우승이 불가능했던 중위권 전력의 두산과 해태가 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박철순과 이상윤의 희생이었다. 우승의 대가는 에이스의 선수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우승은 에이스의 선수생명과 바꿀만한 정도의 가치가 있었단 말인가?

그 시절의 한국인들은 정말 가난했다. 약자가 강자를, 가난한 자가 부자를 상대로 최후의 승자가 되는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야구는 그것을 보여주었고, 가난한 한국인들은 프로야구를 통해서 희망을 보았다. 선수생명과 바꿀만한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그럼, 다시 장명부의 83년 후기리그에 대해서 살펴보자.

장명부는 후기리그에서 이상윤이 그랬던 것처럼 무차별적인 등판을 하는데, 그 때는 너무 늦었다!

장명부는 후기리그에서 7월 10일 완투승을 시작으로 9월 27일 마지막 등판에서 완봉승으로 30승을 장식할 때까지 80일동안 무려 34경기에 등판했으나 13승에 그친다. 타자들에게 익숙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구위까지 하락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리그에 무리하여 20승을 거두고, 후기리그에서는 여유있는 등판으로 30승을 달성한 이후에 체력적인 여유를 갖고 한국시리즈에 대비하려 했던 장명부의 최초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 83년 장명부의 전/후기리그 주요 기록 ]

전기리그 - 26경기 17승 7패 1세이브 215.2이닝
후기리그 - 34경기 13승 9패 5세이브 211.2이닝





야구, 축구처럼 규모가 큰 종목의 프로스포츠 리그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1. 중진국 이상의 경제력
2. 5천만명 이상의 인구
(국토 면적에 따라 유동적)
3. 빅-마켓 프렌차이즈 (야구, 축구에 미쳐있는 대도시)


전세계에 경쟁력있는 야구, 축구리그가 소수에 불과한 이유가 위의 3가지 조건을 전부 갖춘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조건은 바로 3번이다. 1, 2번 조건을 갖추었어도 3번 조건을 갖추지 못할 경우에는 리그를 정착시킬 수 없다.

프로스포츠 리그가 만들어지면 처음 몇 년 동안은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는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KBO는 1번 조건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출범했음에도 조기에 빅-마켓 프렌차이즈를 확보할 수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프로야구는 침체에 빠졌으나 92년 롯데의 우승을 시작으로 90년대 중반에는 경제력까지 갖추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90년대 후반에는 경제 위기를 시작으로 프로야구는 또 다시 침체에 빠지게 되지만 부산의 야구 열기를 발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프로스포츠와 관련하여 이런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열기"

프로스포츠에서의 "열기"는 바이러스가 옮기는 전염병과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열기" 바이러스의 근원지가 존재해야 하며, 근원지가 크면 클수록 "열기" 바이러스의 폭발력도 커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열기"의 근원지를 "빅-마켓 프렌차이즈"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산은 어떻게 "열기"의 근원지가 되었을까?
70년대 고교야구 인기 때문에? 아니면 70년대 위성 중계를 통해서 NPB를 시청했던 극소수의 부산 시민들 때문에?


[ 83년 5월 16일 경향신문 ]



하위에 맴도는 두 팀의 대결인지라 팬들의 관심도 적은데다 홈팀 롯데측의 홍보활동이 너무나 뒤져 관중동원에서 축구에 완패했다.


서울은 특성상 빅-마켓 프렌차이즈의 가능성이 희박했다. 한국에서 빅-마켓 프렌차이즈가 될 수 있는 대도시는 부산이 유일했고, 롯데는 KBO 출범이후부터 바닥만을 사수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83년에는 프로축구가 출범했다. 설상가상으로 멕시코 청소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면서 부산은 벼랑끝에 놓이게 된다.


[ 83년 6월 13일 경향신문 ]




롯데가 정신차리지 않는 이상 프로야구의 예정된 몰락은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전성기의 최동원에게는 막장팀 롯데를 우승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어깨부상 후유증과 메이저리그 진출 좌절로 의욕을 상실한 최동원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참고> 양키스, 다저스를 물리치고 최동원을 스카웃 한 블루제이스


[ 83년 9월 1일 동아일보 ]



부산 관중들은 8회 롯데가 무려 5점을 뺏기자 흥분, 병을 던지며 『부산에 오지말라, 최동원을 내보내라』
강병철 롯데 감독은 『최동원이 지난 25일 경기후 팀을 이탈, 자체징계중이라 등판 시킬 수 없었다.』



80년대 내내 롯데가 막장팀의 지위를 고수했다면, 단언하건데 현재의 야구도시 부산은 없다!

92년에도 롯데는 우승을 하지만 그 우승이 최초의 우승이었다면 그 때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승을 한다고 비인기팀이 인기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단순히 우승을 한다고 해당 도시가 야구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도시를 특정 종목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시 전체를 미치게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84년에 부산 전체를 미치게 만든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82년은 15명도 안되는 엔트리로 시작한 팀이 2개팀이나 되었고, 83년에도 형식적으로 머릿수를 채웠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82년 백인천과 박철순, 83년 장명부와 이상윤의 엽기적인 기록은 그래서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84년부터 KBO는 달라지게 된다. 엔트리 구성이 완료되면서 리그 경쟁력이 만들어진 첫 시즌이 된다. 스타급 선수들도 주전 경쟁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리그 경쟁력이 만들어진 첫 시즌이었기 때문에 정말 치열했다. 리그 최고 투수들의 기록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김시진 - 39경기 19승 11패 2세이브 215.0이닝 (3.18)
김일융 - 38경기 16승 10패 3세이브 222.0이닝 (2.27)
장명부 - 45경기 13승 20패 7세이브 261.2이닝 (3.30)
이상윤 - 40경기 10승 13패 8세이브 211.2이닝 (2.85)


하지만 최동원은 예외였다. 전성기의 90% 가까이 기량을 회복한 최동원은 막장팀 롯데를 우승으로 이끈 것이다.

<참고> 슈우트(투심, 싱커)의 달인이었던 84년의 최동원


참고로 84년 롯데가 막장팀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4년 롯데는 막장팀이 맞다. 쉽게 알아낼 수 있다. 83년에 9승에 불과했던 최동원이 84년에 부활하여 27승을 거두면서 롯데가 우승한 것이므로 84년에도 최동원이 부활하지 못했다는 가정을 하여 승/패 계산을 다시 하면 된다. 즉 84년에 최동원이 14승을 했다고 가정하면 된다. 27 / 2 = 13.5 (14승)

83년 9승에 비해 5승을 더 한 것이므로 결코 무리한 가정이 아니며, 롯데 전적에서 13승을 제거하고 13패를 추가하면 되는데, 여기서 상위 3개팀에는 3승씩, 그리고 중/하위 2개팀에는 2승씩을 나누어주면 다음과 같은 새로운 팀 순위가 만들어진다.

1. 두산 - 61승 38패 1무  (+3승)
2. 삼성 - 58승 42패 ---   (+3승)
3. 청용 - 54승 45패 1무  (+3승)
4. 해태 - 45승 52패 3무  (+2승)
5. 삼미 - 40승 57패 3무  (+2승)

6. 롯데 - 37승 61패 2무 (-13패)


놀랍게도 84년 롯데는 막장팀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실 84년 롯데의 우승은 그 어떤 가설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장명부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이라는 평가를 받은 김일융 조차도 고전을 했던 시즌이 84년이었다. 그 만큼 팬들의 관심도 대단했고, 따라서 롯데의 기적적인 우승은 부산 전체를 미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통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박철순, 장명부, 이상윤, 최동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내용과 많이 다를 것이다.

80년대 프로야구가 현재에 와서 심각하게 왜곡된 이유는, 그 시절 야구팬들의 수준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실력있는 매니아들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정확한 정보를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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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스, 다저스를 물리치고 최동원을 스카웃 한 블루제이스 야생야사



얼마 전 간암으로 5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타계한 최동원 야구선수의 뉴스가 한동안 모국뉴스에 나왔었다. 롯데구장에서 기념경기도 갖고 그의 배번을 영구넘버로 남기겠다면서 각종 기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한국야구의 붐뿐 아니라 캐나다 야구의 붐도 가져올 뻔 했었다.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세계 최고의 프로야구리그인 메이저리그(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스카웃된 것이었다.

내가 최동원 선수의 블루제이스 입단소식을 들은 것은 1981년 9월 중순이다. 캐나다 한국일보에서 근무할 당시였다. 그해 8월 에드먼튼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팀이 최동원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3등을 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었다.

하루는 글로브앤드메일에서 전화가 왔다. 야구를 담당하는 기자라면서 최동원 선수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그 당시는 일간지(한국일보)를 기자 2명이 만들던 때라 시간이 없어 한국일보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 기자가 전하는 소식은 블루제이스가 최동원 선수와 계약한 것 같은데 선수에 대해 아는 대로 알려 달라고 했다. 최동원 선수에 대해 경남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치면서 철인투수이고 불세출 스타라고 알려주면서 이제는 내가 취재에 들어갔다. 어떻게 스카웃했고 계약내용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기자는 자기는 확실한 것은 모르고 블루제이스 담당자를 소개해 줄 테니 직접 취재하라고 했다.

블루제이스 경기가 열리는 날 경기장(지금은 없어진 엑스비션 스태디엄)에 초대되었다. 선수 개발팀장인 엘리엇 왈리를 만났다. 곧 이어 그 당시 선수단장이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팻 길릭도 소개받았다. 자기들이 최동원 선수를 블루제이스 투수로 스카웃했다면서 1982년부터 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병역문제가 걸리는데 이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을 물었다. 한국은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면 면제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일 최동원 선수 계약 발표가 있으니 기자회견장에 나와달라고 했다. 다음날 기자회견장에는 최동원 선수 쪽은 아무도 없는 가운데 최 선수를 대신해서 내가 취재에 응해야 했다. 짧은 영어에 아는 것은 제한되었는데 그토록 당황한 적도 없었다.

그 후에도 계속 블루제이스는 계약서 사본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어떤 방법이 없냐고 했다. 제이스는 서울에서 열리는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 나는 한국일보 본사에 왜 최동원이 못 오느냐 국위선양인데 그리고 군사정권인데 보내면 보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한국 쪽에서는 최동원 측에서 계약사실을 우물쭈물하는데 계약한 것이 사실이냐고 계속 물었다. 그래서 사본을 보여주고 사실이며 계약을 위반하면 큰 법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서울의 세계대회를 앞두고 82년 7월에 몬트리올에서 메이저리그 올스타 게임이 열렸다. 나도 취재허가를 신청해 한국기자로는 최초로 올스타게임을 취재할 수 있었다. 거기서 만난 한국프로야구 초대 커미서너 서종철씨, 사무총창 김창환씨 등 한국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최동원 선수의 북미진출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해 8월 서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나도 마침 서울에 갈 일이 었어 잠실야구장에 갔다. 팻 길릭과 스카우트인 웨인 모간을 만났다. 그들은 한국팀 우승에 많은 희망을 걸었다. 한국은 우승을 했고 최동원 선수의 병역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프로야구 출범을 앞둔 한국은 막무가내로 최동원 선수의 북미진출을 막았다. 오히려 밀워키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던 박철순 선수를 불러들이는 등 한국선수들의 해외진출을 막고 있었다.

최동원 선수 측은 여러 이유로 계약을 불이행하고 있었다. 블루제이스는 그 후에도 서울지방법원에 제소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별 소용없었다. 이 당시 최동원 선수의 계약은 메이저리그 계약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이러한 호조건으로 입단하는 선수는 없다. 대부분의 선수가 마이너리그계약으로 수년간 강훈련을 견디어야 메이저리그 진출할 수 있다 적어도 50%의 선수가 메이저 진출에 실패한다. 최동원은 메이저계약으로 마이너리그에 보낼 수가 없는 계약이었다. 최동원이 만약 블루제이스 유니폼을 입었으면 토론토의 월드시리즈우승이 5, 6년 앞당겨질 수도 있었고 또 박찬호의 미국 진출로 시작된 한국 프로야구 붐도 10년쯤 앞당길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렇게 근시안적인 한국 야구는 아직도 메이저리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동안 여러 선수들이 왔으나 박찬호·추신수 정도만 중급에 머무르고 아직도 한국선수는 북미에서 별로 스카웃을 안 하고 있다. 30년 전의 억지가 한국야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까지 오른 북미 최고의 스카우트인 팻 길릭은 그 후로는 한 번도 한국선수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길릭은 블루제이스를 우승시켰고 시애틀과 볼티모어도 우승 문턱까지 끌어 올리고 3년 전에는 필라델피아를 우승시키고 은퇴했다.

그 당시 왜 최동원을 데려오려고 하냐고 물으니 “완벽한 제구력(Perfect control) 때문”이라고 하던 엘리엇 왈리 선수개발팀장의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완전한 야구를 추구하던 최동원 선수가 그 꿈을 못 이룬 채 먼저 갔다. 어쩌면 이 근시안적이며 편협한 한국야구가 최 선수의 꿈도 접고 수명을 단축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뒤늦게나마 최동원 선수의 명복을 빈다.


유승민 전 본보 편집부장·세방여행사 사장

캐나다 한국일보 (http://www.koreatimes.net/111776)
발행일
: 2011.11.01




그 당시 왜 최동원을 데려오려고 하냐고 물으니 “완벽한 제구력(Perfect control) 때문”이라고 하던 엘리엇 왈리 선수개발팀장의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완전한 야구를 추구하던 최동원 선수가 그 꿈을 못 이룬 채 먼저 갔다. 어쩌면 이 근시안적이며 편협한 한국야구가 최 선수의 꿈도 접고 수명을 단축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뒤늦게나마 최동원 선수의 명복을 빈다.

<참고> 최동원이 남긴 자취 - 82년 세계선수권과 구도 부산





에가와 스구루가 최동원에 비교될 수 있는 레벨인가? 컬럼


일본 야구사 최초의 괴물이자 시대의 압도성에서 역대 최고였다는 에가와 스구루!

일본인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일본 야구의 우수성을 증명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괴물투수 에가와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메이저리그 도전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위키백과에 나온 에가와에 대한 설명중에서 성인야구 시절인 대학야구 부분을 보자.


마지막 부분에 눈에 띄는 문장이 보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의 직원으로 미국에 유학갔으며, 서던 갤리포니아 대학교에서 2승 2패를 기록했다.

날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에가와는 미국에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리러 갔던 것이다.

미국에는 언론사가 엄청나게 많다. 만약 당시에 에가와를 다룬 미국 언론이 존재한다면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신격화 작당질에 관한한 세계 최고라 할 지라도 미국 언론까지 통제할 수는 없으니깐!


The Albany Herald 77년 7월 6일




77년에 에가와는 College Baseball Championship Series 대회에서 미국 대학팀을 상대로 호투한다(중요한 내용이 아니므로 관련 외신은 일부만 공개한다). 3경기에 등판하여 1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에가와는 78년 앵커리지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하는데,

이 대회가 중요한 이유는 에가와 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망주들이 다수 참가했고, 따라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선희도 79년에 (동일한 장소, 시기에 열린 동일한 대회로 추정되는) 이 대회에 참가한 사실이 있다.


[앵커리지(알래스카)=동양] 79년 7월 24일




동양통신이 타전받은 신뢰도가 높은 기사이며, 이선희에게도 스카우터의 교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대회에서 에가와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Anchorage Daily News 78년 7월 15일



ANCHORAGE HAD little time to celebrate the win, as the Giants got their revenge in the second contest, scoring four runs in the fifth inning to win 5-4 ...(중략)... Anchorage started the second contest with Suguru Egawa, who through four innings gave up only one run on two base hits. Then the lid blew off.

The Japanese standout began the fifth inning without signs of any problems, getting the lead-off man to fly out to center. But back-to-back single by Ricki Bass and Vern Followell, added to a walk (Egawa's second), loaded up the bases for the Giants.


두 번째 경기에서 에가와는 4회까지 1실점으로 막았으나 5회에만 연속 안타와 볼넷으로 4실점을 하면서 팀은 4-5로 패배한다.

6일을 푹 쉬고 등판한 세 번째 경기에서는?


Anchorage Daily News 78년 7월 22일



All the Interior club needed last night was the bat of Tim Wallach. The first baseman, who tied a league record with three homers in one game against the Pilots earlier in the season, came up with two more last night ...(중략)... AMAZINGLY, both shots came off starting pitcher Suguru Egawa. The highly - touted Japanese pitcher has not yet lived up to his reputation, as his record dropped to 0 - 3. Before being relieved in the sixth, Egawa had given up a total of eight hits - four of those for home runs.


6회까지 8피안타에 한 타자에게만 2개의 홈런을 포함하여 무려 4개의 피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의 패전으로 3패만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도 보인다.


Anchorage Daily News 78년 7월 29일




6일을 푹 쉬고 등판한 네 번째 경기에서 7이닝 1실점(무자책)으로 첫 승리를 기록한다.

에가와 특유의 정면승부 기질과 차원이 다른 파워의 미국 대학 타자들의 알루미늄 배트는 고교야구 시절부터 완투 머신이었던 일본 야구사 역대 최고 투수 에가와를 3류 투수로 전락시켰다(주목할 점은 전 경기 모두 6일 휴식 등판).

4경기에 등판해서 완투한 경기도 없었고 가장 호투한 경기에서도 볼넷을 남발했다는 점에서 투구 패턴에 상당한 변화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에가와가 찾아낸 돌파구는 미꾸라지 피칭의 미리보는 마쓰자카였다.


이후에 에가와를 찾아볼 수 있는 외신은?

에가와를 NPB 에이스로 소개하는 짤막한 외신과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기사에 에가와가 언급되어 있는 정도가 전부이다.


78년에 미국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에가와는 다음 해 요미우리에 입단하여 6월 2일 데뷰전을 시작으로 워밍업 시즌을 마치고 80년부터 대폭발을 한다. 특히 81년에는 다승, 승률, 방어율, 탈삼진의 4관왕에 오르며 센트럴리그 MVP로 선정된다.

80년 261.1이닝 18완투, 81년 240.1이닝 20완투, 82년 263.1이닝 24완투 미국 대학팀의 알루미늄 배트 상대로는 무려 6일 휴식 등판에서도 완투가 불가능했지만 우물안 리그 NPB에서는 4~5일 휴식 등판임에도 다시 완투 머신이 된다.

그렇다면 에가와가 요미우리에 입단해서 80년부터 기량이 급상승한 것일까?

만 20세에 일본 야구사 역대 최고 아마추어 투수라는 평가를 받은 기량이 더 이상 어떻게 상승한다는 것인가?

달라진 건 없었다. 고작 1년(79년)의 경험만으로 NPB 내성이 생긴 것 뿐이다. 82년 투구 영상에서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




"150km 돌직구와 120km 명품 커브" 에가와를 대변하는 수식어이다. 그러나 150km라는 구속은 사실이 아니며 120km 명품 커브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140km 후반까지 형성되는 구위 좋은 직구와 기껏해야 110km 전후로 보이는 2류 커브를 던졌다.

영상에서 드러나듯이 직구가 전부이다. 에가와를 일본 야구사 최초의 괴물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강력한(?) 직구였다. 그리고 이 직구로 인해 2류 커브가 명품 커브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직구가 북중미 타자들에게는 돌직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운동능력) 레벨차이 때문이다. 북중미 야구 관점에서는 박철순이 싱글A부터 시작했던 것처럼 에가와도 싱글A 견적이 나왔다는 것이다. 에가와의 가장 강력한 무기(돌직구)가 북중미 야구에서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08년에 일본 후타바사에서 출간된 [프로야구 최강열전]에 나온 순위는 어떻게 된 것인가? 어째서 메이저리그로부터 관심(?)까지 받은 곽태원이 21위이고 에가와가 18위인가?

그건 애비도 모르는 개족보에 불과하며 곽태원은 메이저리그의 관심을 받은 사실이 없다! 토론토의 극동지역 스카우터인 웨인모건의 관심을 받았을 뿐이고, 만약 토론토와 계악을 했어도 곽태원 또한 싱글A부터 시작해야 하는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우물안 개구리들의 비교는 동일한 리그에서의 커리어가 존재할 경우에는 기록과 임팩트로 비교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에가와가 곽태원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동일한 개구리이고 동일한 리그의 커리어가 존재하며, 임팩트에서 에가와가 곽태원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사실 에가와의 18위는 저평가된 면이 있다. 추측이지만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곽태원은 최동원과 비교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KBO는 신생 구단이 창단되면 부실하기 짝이 없다. 부실한 선수층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신생 구단도 동일한 시스템을 갖춘 상태에서 시작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기존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북중미 지역에서 유망주들을 스카웃하는 시스템을 이미 구축한 상태였다면 신생 구단은 그게 잘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토론토는 미개척지였던 극동지역을 개척했고,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 극동지역 스카우터가 거론될 때마다 항상 토론토의 웨인모건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뒤늦게 최동원의 가능성을 확신한 다저스는 계약금 20만달러, 연봉 15만달러의 대형 교섭을 했던 것인데,


"선동열에게 다저스의 2년간 50만달러 오퍼설"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최동원에 대한 메이저리그의 평가 << 선동열은 무조건 그 이상의 평가의 선빠 공식에 근거한 가설로 추정된다.

계약금 20만달러 + 연봉 15만달러 << 계약금 20만달러 + (연봉 15만달러 x 2) = 2년간 50만달러!

<참고> 선동열의 메이저리그 오퍼/계약 외신 뉴스


마이너리그가 치열한 경쟁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은 시기는 80년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자동차 산업과 미디어의 발달로 메이저리그를 쉽게 접하게 되면서 70년대 내내 마이너리그 사정이 좋지 않았다. 시스템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70년대 후반부터 세계 각지의 유망주들을 스카웃했고 메이저리그의 세계화의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컸다. 북중미의 유망주들을 싹쓸이 하면서 북중미 야구의 기반이 부실해졌고 북중미 야구의 몰락을 초래했다. 또한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쟁 환경은 미국의 청소년들, 특히 흑인 청소년들이 야구를 기피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그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유망주들의 숫자는 오히려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메이저리그는 세계화를 추진했고 4개팀이 추가 창단되면서 아시아 선수들에게도 도전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곽태원이 경험한 북중미 선수들과 에가와가 경험한 북중미 선수들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80년대에는 미국 프로에서 경쟁을 했을 선수들이 70년대만 해도 아마추어 선수였다는 차이점이 있다. 즉 시대 차이가 곽태원을 특별하게 보이게 했던 것 뿐이다.

76년 제 1회 세계야구선수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최초의 메이저 대회였던 76년 세계야구선수권에서 한국은 콜롬비아, 대만과 함께 공동 5위를 하는데 실상은 바닥이었다.


"완투할 투수 없어 고전" 정확하게 따져서 북중미 상위팀을 상대로 완투할 투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경기 전적을 보자.

푸에르토리코 1-3   (패)
니카라과       3-6   (패)
도미니카       4-13 (패)
쿠바             2-13 (패)
파나마          2-3   (패)
콜롬비아       6-5   (승)
네덜란드       5-1   (승)
멕시코          9-0   (승)
일본             6-4   (승)
대만             4-0   (승)
이선희 완투

야구 인구가 한국보다도 적은 파나마, 콜롬비아와 호적수였고 프로리그(멕시칸리그, 독립리그)가 발달한 멕시코만 여유있게 이겼을 뿐이다. 미국이 참가했다면 더 비참했을 것이다.

일본은 미국, 쿠바와 오래전부터 야구 교류를 해 왔고 물정에 밝았기 때문에 어설픈 정통파 투수들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투수진이 기교파 일색이었고 단판 승부를 하는 국제경기의 특성상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물정에 어두웠던 한국과 대만은 어설픈 정통파들로만 투수진을 구성했다 박살이 났던 것이다(쓸만한 기교파 투수들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주목할 점은 이 대회에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가 7승 2패로 공동 1위를 했는데, 콜롬비아 대회 운영위는 3전 2선승제의 결승 시리즈를 급조했고 푸에르토리코가 거부하면서 쿠바가 우승국이 된다. 그렇다면 푸에르토리코가 거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쿠바 대표팀의 주력 투수들은 다른 팀의 에이스급이었지만 선수층이 부실한 푸에르토리코는 사정이 달랐다. 북중미 상위팀을 상대로 완투가 불가능한 것은 북중미 투수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연투는 상상도 못했다.

참고로 옛날신문을 보면 대표팀 구성부터 문제가 많았다는 기사가 있지만, 그건 희생양을 찾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실제로 77년 대륙간컵에 출전한 대표팀의 핵심 멤버들은 사실상 변화가 없었다(투/타의 핵심이었던 이선희, 김재박은 76년에도 있었다).

실질적인 변화는 이선희와 함께 대표팀 마운드를 이끌었던 우완 정통파 김호중 대신에 들어온 만 19세 소년 최동원!

아시아에서 온 소년은 아시아 야구사에서 그 어떤 투수도 하지 못한 투구를, 강속구의 정통파 투수는 북중미 상위팀을 상대로 완투가 불가능하다는, 심지어 북중미 투수들도 연투는 꿈도 못 꾼다는 상식을 깨면서 북중미의 덩치들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린다.

한국만 30km를 이동하여 더블헤더를 치르는 황당한 경기일정에서 두 번째 경기 콜롬비아전에서 완투승(4-1)을 했고, 바로 다음날엔 전년도 세계야구선수권 1위였던 푸에르토리코전에 위기에 구원 등판하여 연장 혈투끝에 역전승을 하면서 무실점 승리투수(4-2)가 된다.

대만은 이 대회에서도 7위에 그치며 세계무대에서 사라진다. 반면에 한국은 2일동안 3경기를 모두 이기면서 우승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대만 야구를 월등히 앞서 나가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82년 세계야구선수권 유치 신청).

한국 야구와 대만 야구의 운명은 단 1명의 투수에 의해 바뀐다. 고교야구 인기를 배경으로 KBO를 출범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대만은 야구가 국기임에도 프로야구 출범이 한국보다 8년이나 늦어지게 된다. 세계대회 성적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 야구는 77년에 최동원이 등장한 이후에 81년까지 세계대회에서 항상 일본보다 우위였고 4강에 들었다.

77년 대륙간컵    - 한국(1위) 일본(3위) 쿠바 불참
78년 세계선수권 - 한국(3위) 일본(4위)
80년 세계선수권 - 한국(2위) 일본(2위)
81년 대륙간컵    - 한국(4위) 일본(6위)

대중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프로야구 출범은 불가능하다. "세계무대에서 바닥을 기는 주제에 어떻게 프로야구를 하나?"

88올림픽이 끝나고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세계화가 시작되었고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면서 볼거리가 넘쳐나게 되었다. 90년에 출범한 대만 프로야구가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78년 에가와는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도전했으나 결과는 비참했다. 우물안에서 바다로 나와 보니 일본 야구사 역대 최고 투수는 한낱 개구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동일한 시기에 만 20세가 된 최동원은 아마야구 세계 최고 투수로 등극한다.

<참고> 최동원이 남긴 자취 - 82년 세계선수권과 구도 부산


81, 82년에 에가와는 일본 프로야구 NPB의 에이스로 등극한다. 동일한 시기에 최동원은 토론토로부터 "즉시 전력감"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경쟁이 치열했다는 80년대에 계약과 동시에 로스터에 등록되는 최초의 선수가 된다.




The Complete Handbook of Baseball 1982 (Zander Hollander, Penguin Group (USA) Incorporated, 1982)


그 시절에 이미 프로야구 역사가 40년이나 되는 NPB를 동네야구 취급했던 메이저리그가 프로야구도 없던 한국의 아마추어 선수를 계약과 동시에 40인 로스터에 등록시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최동원에 대한 기대치는 어느 정도였을까?

로스터 하단에 보면 토론토의 역대 에이스들 중 한 명인 "37 Stieb, Dave"가 보일 것이다.


출처 - http://slam.canoe.ca/Slam/Baseball/MLB/2011/09/17/pf-18701201.html

지난 9월 17일 최동원의 타계를 알린 외신을 보면 내용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After seeing him pitch in Edmonton, Morgan predicted the right-hander would be the next Dave Stieb.


최동원을 Dave Stieb와 함께 토론토를 이끌 에이스급으로 기대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 KBO 최고 투수인 류현진과 메이저리그에서 관심을 보인 윤석민을 합쳐야 3선발 기대치가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믿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80년대 메이저리그의 수준은 21세기와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 윤석민은 메이저리그에서 3선발이 가능할까?


전성기의 최동원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는데, "최동원이 푹 쉬고 나오면 이길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엔 별 잡다한 대회가 엄청나게 많았고 현재의 포스트시즌보다 더 빡빡한 연전 시스템의 단기전에서 연투가 일상이었던 최동원이 베스트 피칭을 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대회 첫 경기의 등판은 공백기간 이후의 첫 등판이 되므로 베스트 피칭이 불가능하고, 최동원은 대회 첫 경기를 시작으로 연투를 했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78 ~ 81년)에는 3일 휴식 등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부터 각종 대회가 이어지면서 대회 첫 경기에서의 등판이 마치 충분한 휴식 이후에 등판하는 형태가 될 때가 있긴 있었다. 바로 이런 경기에서 최동원을 상대로 이긴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1점 홈런으로 이긴다면 모를까.

전성기의 최동원은 세계 메이저 대회에서도 3일 휴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얼추 3일 휴식 등판으로 볼 수 있는 경기가 딱 1경기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또한 8.1이닝 - 1일 휴식 - 9이닝 - 2일 휴식 - 1이닝 다음날의 등판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3일 휴식은 아니었다.

그나마 그 경기가 최동원의 베스트 피칭 위력을 추정할 수 있는 (세계대회에서의) 유일한 경기라 할 수 있는데, 일본이 사실상 최하위(6위)를 했던 81년 대륙간컵이었고, 예선 마지막날 4강 티켓을 놓고 (미국과 쿠바를 모두 이긴) 홈팀 캐나다와 벼랑 끝에서 만나게 된다.

그럼 외신을 통해서 최동원의 베스트 피칭 위력을 추정해 보도록 하자.




Choi, who throws 200 pitches a day. said most of his strikeouts came on 145-kilometre-an-hour fastballs and sinkers.


국제대회에서는 덕아웃에서 전자 장비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최동원은 스피드건 수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82년에 KBO가 출범하면서 미국식 야구 용어를 사용하자는 캠페인이 있었고, 슈우트라는 표현 대신에 스크류볼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동원은 싱커라는 표현은 사용한 적이 없다.

따라서 외신에 나온 최동원의 인터뷰에서 145km라는 수치와 싱커라는 표현은 스카우터의 의견이 반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 인터뷰 내용은 이게 전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에 200개의 연습 투구를 하며, 대부분의 탈삼진은 직구+슈우트였다."

80년대초에 사용된 최초의 신형 스피드건과 90년대에 사용된 스피드건 수치는 약간의 차이가 있고 21세기에 사용되고 있는 스피드건 수치는 또 다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수치도 점점 올라갔다.

80년대에는 투수가 던진 공 전부를 측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측정해도 절반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평속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대신에 가장 많이 형성된 구속, 즉 중심 구속이 현재의 평속 개념과 비슷했다.

중심 구속이 90마일 이상 나오는 투수들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강속구 투수로 분류했다. 다시 말해서 최동원의 145km는 상당한 구속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동일 경기를 보도한 또 다른 외신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We knew he's a major league pitcher and it would take a real effort to stay close.
He's so fast. he can almost tell you the fastball is coming and you can't do much about it.

우리는 최동원을 메이저리그 투수로 알았다. 너무 빨라서 패스트볼을 던진다고 알려줘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Choi, a 23-year-old righthander, used his blazing fastball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 표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번에는 관련 영상 4개를 차례대로 보면서 최동원의 베스트 피칭 위력을 추정해 보도록 하자.




어깨 부상 이후에 전성기의 90% 가까이 회복된 84년 한국시리즈(1차전 완봉승, 2일 휴식후에 3차전)에서의 투구이다. 전성기의 최동원은 3일 휴식만 보장해주면 위력적인 결정구를 9회까지 던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84년에도 가능했다).




최동원이 한 물 갔다던 86년에 해태전 9회에 던진 드롭 커브이다(152구째). 전성기 시절의 드롭은 130km에서 형성되었고 메이저리그에서도 평균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명품 구질이었다.




어깨 부상에서 회복된 직후인 84년 올스타전에서의 투구인데, 이 때까지만 해도 구속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싱커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쓰리쿼터로 라이징 패스트볼을 구사하는 등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최동원은 딜리버리를 변경하는 투구에 능숙했는데, 이는 투수에게 있어서 엄청난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올드팬들 중에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동원은 커브를 던질 때 투구폼이 노출되었다." 사실은 야구를 모르기 때문이다.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인터뷰에서 김일융은 3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체력이 정말 좋고 어깨가 강한 선수에요. 그래서 오버스로우로 다양한 공을 던지거나 중간에 사이드스로우로 던지는 등 변화무쌍한 공을 던지기 때문에 타자로서는 결정하기 어려웠어요."

<참고> 최동원의 제구력과 경기운영 능력


박찬호가 다저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스포츠 뉴스의 첫 멘트는 다음과 같았다. "자랑스런 한국인 박찬호 선수가..."

그렇다면 훨씬 먼저였던 최동원이 81년에 토론토와 계약했을 때는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을까?





아는게 있어야 충격을 받을게 아닌가!

방한 중이던 캐나다 수상은 내/외신 기자들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팀이 최동원을 잡은 것은 행운"

하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 시절의 한국인들은 야구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과 관련하여 제대로 된 신문기사 하나가 없다. 미국 통신사로부터 타전 받은 기사와 재미교포를 통해 입수한 기사를 제외하고는 전부 엉터리 소설들 뿐이다.


Toronto Star 85년 7월 28일



블루제이스와 계약했지만 오지 못한 한국인 투수 최동원을 기억하는가?
최동원은 작년(84년)에 어깨부상에서 회복하고 정규시즌 27승, 한국시리즈 4승으로 총 31승을 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은 야구를 많이 알았을까?

전문가들도 야구를 잘 몰랐다.
토론토는 최동원의 어깨부상 사실을 알면서도 83년에는 소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최동원은 84년 기량만으로도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들이 이를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춘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1세기 이후에나 판단이 가능해졌다. 과거에는 무지했기 때문에 우물안 국보와 대책없이 비교했던 것이다.

86년에 장명부는 이런 말을 했다. 기자들이 창작한 소설이 아닌 여러 페이지에 걸친 하일성과의 대담 기사에서 한 물간 86년 최동원에 대해서 장담을 했다. "최동원은 지금 당장 일본에 가도 확실한 10승 투수다!" 이 간단한 평가도 당시에는 엄두를 못 냈다.

<참고> 투구폼 메카니즘으로 재평가한 선동열


[ 野生野死 컬럼중에서 ]

대한민국 국민들이 타파해야 할 <가짜를 영웅으로 만드는 더러운 근성>을 언급하면서 예로 든 <성웅 이순신도 모르는 조선인>과 단군 이래 한반도의 대표적인 흑역사들 중 하나인 칠천량 해전의 졸장 원균에게 "충무공" 시호 하사보다 더한 막장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임진록이라는 소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이다. 임진록 내용 중에 1400년전에 죽은 관우가 귀신으로 나타나 명나라 군대에게 가호를 내리고, 가호를 받은 명나라 군대가 일본군을 모조리 도륙내버리는 장면이 있다.

한 술 더 떠 명나라 황제는 유비, 조선 국왕 선조는 장비인데, 관우가 명나라 황제의 꿈에 나타나 황제를 설득해 원군을 파병했다는 정신나간 소리를 배설해놨다. 책만 불티나게 팔린 것 뿐만 아니라 조선 천지에 관제묘(관우 사당)까지 우후죽순으로 건립될 정도였다.


저 한심한 족속들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의 조상이다. 그런데 후손이란 자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한낱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한 에가와 따위를 신격화하기 위해 무개념 사대주의 일빠들이 조작질한 꼬라지를 보자.


에가와의 저질 커브를 명품 커브로 둔갑시키기 위해 공이 포수 미트에 가까워지자 프레임을 얼마나 대책없이 제거했는지

타자의 배트 스피드가 300km(?) >> 이승엽 배트 스피드 x 2

그래서 저질 커브임을 일깨워 주웠더니 슬라이더였다며 울부짖고 있는 실정이다. 일빠들 눈깔에는 121km가 안 보이는가?




- 최동원의 KS 7차전 9회(10일동안 40이닝) 투구 vs 에가와의 정규시즌 9회(5일 휴식 등판) 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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