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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적에 도전한 노모히데오, 성인의 반열에 오르다!


성인(세인트)은 종교에서 신성시되는 인격자를 의미하며, 서양에는 3번의 기적을 이룬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종교인도 아니고 서양인도 아니지만 일본 야구에는 3번의 기적을 이룬 성인(세인트)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가 바로 노모히데오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그건 조작 아니면 기적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99%가 조작이고 1%가 기적이다. 노모히데오의 등장 자체가 아시아 야구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기적이었다.

노모히데오의 야구인생은 감동과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기적의 연속이었다. 즉 1%의 가능성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기적 - 혜성처럼 등장한 노모히데오


노모히데오는 고교 3학년때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면서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스카우트들은 외면했고 훗날 노모히데오가 말하기를,

"나는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일본에는 고교야구팀이 4천여개나 되지만, 이 중에서 90% 이상이 동호회 수준이기 때문에 노모히데오의 퍼펙트게임은 특별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진>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만 18세를 1개월 앞 둔 노모히데오의 신체조건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80년대 아시아 야구에서 그 보다 더 좋은 신체조건은 찾기 힘들다.

스카우트들이 노모히데오를 외면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세상에 장벽이 존재했던 냉전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아시아의 야구선수들은 세계화 이후의 선수들과는 성장과정이 조금 다르다.


세계화 이전 세대인 60년대 출생자들은 일찍 완성되었고, 정상급의 강속구를 던지게 될 강견은 아무리 늦어도 만 17세에는 잠재력이 드러났다. 세계화 이후 세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현(2013년) 기아 타이거즈 에이스 윤석민의 사례를 보면,


윤석민은 만 17세 이후에도 강견의 잠재력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관련하여 감독의 인터뷰 중에 주목할만한 내용이 보인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물론 대학가서 잘 할 수도 있지만 평범한 선수로 뛰다 사라지는게 아닌가"

야구선수와 일반인은 다르다. 특히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투수의 경우에 만 18세까지도 가능성이 안 보이면, 그건 안 된다는 강력한 신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만 18세부터는 빠른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런 윤석민이 만 17세 6개월째가 되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놀라웠던게 자고 나면 구속이 빨라졌습니다."


투수에게 만 17세까지가 왜 중요한가? 재생능력이 워낙 좋기 때문에 어떻게 될 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미국에서 음주 가능 연령이 가장 빠른 나이가 만 18세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재생능력이 좋을수록 부작용의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88년 노모히데오의 등장은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21세기 청소년 세대인 윤석민은 특이한 케이스지만, 80년대 청소년 세대인 노모히데오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월한 신체조건의 노모히데오는 빠른 성장이 끝난 이후에도 찌질한 공을 던졌고, 프로팀 스카우트들은 비관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관련하여 노모히데오는 사회인 야구팀 입단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그 당시의 노모는 "아. 나는 여기서 평생을 일하게 되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인생은 알 수 없다.


비루했던 노모히데오는 1988년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 사회인 야구를 평정했고 88올림픽에서는 아시아 정상급의 강력한 공을 던졌다. 당시의 상식에서 타고난 강견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150km가 넘는 스피드까지 기록했던 것이다. 늦어도 만 18세에는 145km에 육박하는 최고 스피드가 가능한 강견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꿈의 150km를 돌파했던 것이다.

<참고> 최동원, 박철순, 에가와 스구루의 최고 스피드


정치와 관련해서 이런 말이 있다. "놀라운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음모!"

아시아 야구에서 일명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최초로 사용된 시점은 언제일까?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제품이 최초로 사용되었는지는 알려져 있다. 신기술의 "3세대 스테로이드"이다.

삼성서울병원 스포츠 의학센터 박원하교수의 인터뷰에서 "3세대 스테로이드"의 등장 시점을 확인할 수 있다.





"벤 존슨이 올림픽 출전 1년 6개월전쯤에 3세대가 나왔습니다." 1987년초(2~3월)에 나왔다는 것이다.

아시아 야구사에서 1988년 이전에 노모히데오의 등장에 비교될만한 비슷한 사례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1986년까지도 가능성이 안 보이던 노모히데오는 1987년 이후에 신인류로 진화했고 1988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1세대, 2세대 제품은 왜 사용되지 않았을까?

88올림픽이 사실상 최초의 도핑테스트 올림픽인데,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자기들 끼리만 먹을 때는 검사도 안 하다가" (미국 야구에는 노모히데오와 비슷한 경우가 70년대부터 있었다는 뜻이다.)

80년대 중반에 냉전의 균형이 기울어지면서 공산권의 경이로운 약물 기술이 전세계에 전파되었는데, 3세대 제품에는 그 경이로운 기술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스테로이드 세계화는 아시아 스포츠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화시켰다.



두 번째 기적 - 선구자로 둔갑한 노모히데오


야구팬들이 약물 관련하여 사용하는 "약 빨고 던진다"는 정확하게 따지면 틀린 표현이다. 7~80년대 메이저리그에서 사용된 마약류 약물에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호르몬 계열의 약물은 다르다. 마약류 약물이 보톡스라면 호르몬 계열의 약물은 성형수술인 셈이다.

(호르몬 계열) 약물로 강견을 만든 이후에는 꾸준히 트레이닝만 하면 더 이상 약물 없이도 강견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유효기간이 있다.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 이후부터는 부상 또는 구위가 하락하는 등의 고비가 반복되면서 약물 사용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나중에는 비시즌 기간이 약물 보충 기간이 될 정도로 주기가 짧아진다(부작용의 가능성도 점점 높아진다).

관련하여 야구기록 안내자 김형준이 편집한 노모히데오 신격화 스토리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데뷔 후 첫 4년간 너무 많은 공을 던진 노모는, 1994년 마침내 어깨에 무리가 왔다. 여기에 1993년에 부임한 스즈키 게이시 감독은 입단 당시 약속을 깨고 노모의 투구폼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 300승을 달성한 스즈키 감독은 노모가 8월에 부상을 당하자 "이제 그는 끝났다"는 발언을 했다. ·········· 시즌 후 노모는 구단에 다년 계약을 요구했다. 하지만 구단은 거부했다.


"이제 그는 끝났다." 스즈키 감독만 단언한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노모는 구단에 다년 계약을 요구했지만 구단은 거부했다."

스즈키 감독의 발언과 구단의 조치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 이후의 두 번째 어깨부상은 구위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이 상식으로 통했다.

스테로이드 세계화 이전 세대에게는 불변의 진리였다.

1991년에도 어깨부상이 있었지만 경미한 부상이었고, 재생능력이 좋은 만 23세였으나, 두 번째 어깨부상은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의 심각한 부상, 즉 다시는 구위를 회복할 수 없다는 확실한 신호였기 때문이다.


선동열도 1992년에 어깨부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4월 11일 완투 이후에 어깨에 염증이 생겼고, 4월 25일 자진 강판한 이후의 등판일지를 보면 가관이 따로 없다. 경미한 부상임에도 공백기간이 2개월이 넘는다.


투수에게 어깨부상은 사형선고라는 말이 있다. 특히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 이후의 어깨부상은 회복한다 하더라도 구위 회복이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선동열이 무리를 했거나, 심각한 부상이었다면 선수생명은 끝났을 것이다.


브랜든 웹은 어깨부상으로 끝내 은퇴를 하게 된다(1992년 선동열과 동일한 나이때 부상). 3년간의 재활은 소용이 없었다. 재생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만 26세 이후의 어깨부상은 일반 야구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구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러한 상식이 노모히데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관련하여 노모히데오 신격화 스토리를 보면,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던 10월 1일 경기에서, 노모는 4회 머리에 타구를 맞고 교체됐다. 두개골에 실금이 간 상황. 하지만 노모는 9일 경기에 자원 등판, 7.1이닝 동안 144개의 공을 던졌다. 그리고 13일 경기에서는 10이닝 완투를 하면서 182개를 던졌다. 노모는 17일에도 연장 10회까지 177개의 공을 뿌렸다.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9일 동안 3경기에 나서 503개의 공을 던진 것. 이는 스즈키 감독을 향한 메시지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보여준 마지막 투혼이자 작별인사였다.


8월에 어깨부상을 당한 노모히데오는 10월 1일 복귀하여, 즉 2개월도 안 되는 공백기간임에도 경이로운 투구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구에 머리를 맞고 두개골에 실금이 간 상태에서도 자원등판을 하는 투혼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20대 야구선수의 골밀도는 일반인과는 다르다. 두개골에 실금이 간 충격은 심각한 상태를 의미한다(대부분 수술로 이어진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추측이지만, 당시 노모히데오의 골밀도가 일시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 야구에는 노모히데오 등장 이후에 고교때 가능성이 안 보이던 선수가 고교 졸업후에 우월자로 둔갑하는 기적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기적은 단 한 번으로 끝난다.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이룬 이후에 기적을 이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양심도 있기 때문이다. 노모히데오의 두 번째 기적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모히데오는 멈출 수가 없었다. 타고난 천박함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저리그를 개척한 선구자로 둔갑했던 것이다!

<참고> 아시아 야구사 역대 최고 스테로이드맨 노모히데오



세 번째 기적 - 예수처럼 부활한 노모히데오


토미존 서저리가 투구 스피드를 증가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무려 10km 이상 증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인대는 스피드 증가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스피드 증가는 근육 수축 능력이 더 좋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피드 증가는 재활 프로그램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꿈치 뼈조각 제거 수술의 경우에도 재활 프로그램 이후에 스피드가 증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재활 프로그램 때문에 스피드가 증가하는 것이라면, 재활 프로그램을 적용한 트레이닝을 할 경우에는 더 빠르고 강력한 공을 던질 수도 있다는 것인가? 어째서 수술 이후에만 재활 프로그램 효과를 볼 수 있나? 스피드 증가는 (성장기때가 아니라면) 호르몬 치료를 병행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97시즌이 끝나고 10월에 팔꿈치 뼈조각 제거 수술을 받은 노모히데오는 98시즌에 노쇠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구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 된다. 결국 98시즌이 끝나고 일본 복귀설까지 흘러나오게 된다.

노모히데오가 부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세 번째 기적을 쓰지 않았다면 약물의혹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노모히데오는 또 다시 기적을 썼던 것이다. 사기극의 실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기적을 반복했던 것이다.

2003년(만 35세)까지도 최고 스피드 150km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사대주의 일빠들은 열광했다. 아시아 야구사에서 전무했던 위대한 신인류와 동시대를 함께 했다면서 감격했고, 노모히데오를 배출한 大일본제국을 경외했다.


노모히데오는 2003년까지 전성기를 방불케하는 강력한 공을 던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2004년부터 구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다. 그것이 기적의 마지막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7년 스테로이드 세계화 이후에 1988년에 혜성처럼 등장했고, 스테로이드가 철퇴를 맞은 2003년에 드라마틱했던 야구인생의 막을 내렸다. 노모히데오가 가장 선호했다는 번호 16처럼 무려 16년동안 기적의 야구인생을 연출했던 것이다.


2003년 배리본즈의 법정증언은 약쟁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고, 신개념 조작 기법이 완성될 때까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쌓아놓은 것이 많았던 노모히데오는 더 이상의 기적은 시도하지 않았다.

비루했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노모히데오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한국 언론도 불굴의 투지라며 신격화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진정한 영웅의 작렬한 최후처럼 포장해 주었다. 성장기때 찌질이는 영원히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야구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이없게도 노모히데오를 (작렬한 최후였다는 의미로) 사쿠마 쓰토무에 비유하는 신격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 사쿠마 쓰토무는 이런 인물 -

1910년 봄, 일본에서 73톤에 불과하지만 최신형 군함 한척이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함정의 이름은 제 6잠수정. 미국에서 다섯척을 직도입한 홀랜드급 잠수정을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한 함정이다. 미국제 보다 성능이 떨어졌어도 첫 국산 잠수정이었기에 일본은 우수인력을 뽑아 시험 항해에 나섰다. 기대와 달리 두번째 잠항훈련에서 6호정은 히로시마만의 16m 해저에 가라앉고 말았다.

침몰 이튿날 인양된 6호정은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14명의 승조원들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기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장은 사령탑에, 기관장교는 전동기 옆에, 조타병은 조타석에서 죽었다. 영국 해군에서 동형의 잠수정이 침몰했을 때 먼저 탈출하려고 시신이 출입구에 엉겨붙은 채 발견되고 심지어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난투극까지 일어났던 전례와는 완전히 다른 일본 군인들의 죽음에 세계가 전율했다.

일각에서 제기한 조작설도 사쿠마 쓰토무 대위의 유서 하나로 자취를 감췄다. 사고발생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두시간 동안 그는 침몰 원인과 대응을 상황별로 기록했다. 975개자(字)의 유언 중 가장 감명을 준 대목은 일본 국왕에 대한 탄원. '폐하의 배를 침몰시키고 부하를 죽게 한 소관의 죄는 씻을 길이 없으나 승조원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나이다. 그들의 유족이 곤궁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정치와 관련해서 이런 말이 있다. "놀라운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음모!"

단 한 번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반복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놀라운 우연은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NPB 스카우트들이 1986년에 측정한 고교 3학년생 노모히데오의 스피드만 공개되면 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

역사왜곡을 밥 먹듯이 하는 일본이라도 노모히데오가 고교 3학년때 최고 145km까지 던졌다는 날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려 145km를 던지는 우월한 신체조건의 고교생 투수를 복수의 프로팀 스카우트들이 외면한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노모히데오의 사회인 야구팀 입단에 대해 일본문화연구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고교를 졸업할 시기가 되자 프로구단에서 손짓을 해왔다. 그러나 노모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프로로 뛰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그는 아마추어 구단을 택했다."


박찬호가 사대주의 일빠들에게 먹튀, 얌체 구원승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노모히데오의 메이저리그 최다승 기록을 깨려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박찬호도 약물의혹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노모히데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참고> 박찬호 도핑테스트 양성반응과 구로다 히로키의 진화


노모히데오는 최고의 야구선수를 꿈 꾼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3번의 기적을 연출했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우연이 반복되었다. 인간으로서 이해해줄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난 추태였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어쩌면 노모히데오가 추구한 목표는 성인(세인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의 기적에 도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세인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노모히데오 이름으로~ 노모히데오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노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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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박철순, NPB 원조 괴물 에가와 스구루 스피드 비교 야생야사


출처> 野生野死 야구에 죽고 사는 .. | 스틸라이프


1979년 에가와 스구루의 프로 데뷔전 영상에 찍힌 스피드에 미천한 일빠들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무개념 일빠대장 야무영웅이 습관적으로 지껄이는 표현에 적용하면 딱 좆병신 스피드이기 때문이다.





프로 데뷔전이었기 때문에 에가와 스구루는 최선의 피칭을 했을 것이다. 기술이 떨어지던 1979년 영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에가와 스구루의 직구 구위는 위력적이었다. 오승환을 연상시키는 돌직구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최고 스피드는 138km, 평균 스피드는 130km에 불과했다.

127km - 129km - 127km - 131km - 138km - 128km - 126km - 126km - 130km - 128km
127km - 123km - 132km - 127km - 126km - 133km - 131km - 125km - 127km - 131km
130km - 133km - 135km - 136km - 136km - 134km - 127km - 135km - 135km


만약 최동원이 이런 스피드를 찍은 영상이 발견된다면, 미천한 일빠들은 축제를 열었을 것이다.


1979년 7월 28일 기사에 최초로 스피드건을 사용한 경기에서 최동원은 140km, 박철순은 135km가 찍혔다는 내용이 보인다.


미국은 161km, 일본은 152km가 최고 스피드라는 내용도 보인다. 미천한 일빠들이 이 기사만 보았다면 "역시 허접한 7~80년대 한국야구"라며 환호했을 것이다.

어쨌든 에가와 스구루의 프로 데뷔전 최고 스피드 138km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기사에는 1979년 NPB 최고 스피드가 152km라고 하는데, 일본 야구사 원조 괴물의 프로 데뷔전 최고 스피드가 고작 138km?

미국, 일본은 80년대초까지 구형 스피드건과 신형 스피드건을 모두 사용했는데, 아마도 구형 스피드건은 종속을, 신형 스피드건은 초속을 측정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강속구는 보통 10km 전후의 차이가 났다. 빠를수록 차이가 더 컸다고 한다.

느린 공, 즉 초속이 느린 변화구 등의 구질은 기껏해야 3~4km 정도의 차이밖에 안 났을 것이다. 그러니깐 에가와 스구루의 최고 스피드 138km는 신형 스피드건으로는 150km 가까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은 1979년에 구형 스피드건이 들어왔고, 신형 스피드건은 1982년에 KBO가 출범하면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동원의 140km, 박철순의 135km는 만만한 스피드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최동원은 구타 사건으로 팀(연세대)을 이탈하여 3개월이 넘는 공백기간 이후에 첫 경기에서 기록한 스피드였다는 사실이다.


최동원은 구형 스피드건으로 145km까지 측정되었다.

아래 기사에서 재일동포 김의명이 142km, 최동원이 145km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김의명의 142km는 신형 스피드건이다.


최초로 스피드건을 보도한 기사에서, 그리고 위의 기사에서 구별이 안 되어 있는 이유는, 당시에는 스피드건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구형 스피드건으로 아시아에서 140km를 돌파한 고교야구 투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동열은 135km, 제 2의 최동원이라 불리던 최계훈은 137km까지 측정되었다고 한다(최계훈은 고교시절의 혹사로 강속구를 잃어버린다).

최동원은 1978년에 가장 강력한 공을 던졌는데, 세계야구선수권에서는 신형 스피드건으로 157km까지 측정되었다.


메이저리그 최고 스피드가 161km, 그리고 NPB 최고 스피드가 152km였던 시절에 최동원이 157km를 던졌다는 주장이 믿기 힘들 것이다. 1978년 최동원의 비공식 최고 스피드가 159km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 야구팬들은 80년대까지의 쿠바 야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모르고 있다. 메이저리그에도 100마일 투수가 극소수에 불과하던 70년대에 쿠바 리그에는 여러명이 있었다.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에서 쿠바 에이스의 대회 최고 스피드가 무려 160km까지 측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에 쿠바 야구에는 100마일 투수를 가리키는 "수퍼소닉"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런 쿠바 야구가 자국의 전설적인 선수들을 소개한 컬럼에서 최동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supersónico lanzador coreano Dong Won Choi

"수퍼소닉(초음속 광속구) 투수" 한국인 최동원으로부터 대형 홈런을 쳤다고 자랑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박철순과 에가와 스구루는 최동원과 비교해서 차이가 컸을 뿐이지, 그들도 아시아 정상급의 강속구 투수들이었다.


1979년 7월 25일 기사에서 박철순이 구형 스피드건으로 139km까지 던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었고 1982년 KBO에서는 신형 스피드건으로 149km까지 측정되었다고 한다.


박철순이 던진 공 27개 중 슬라이더 4개, 커브 3개를 제외한 직구 20개의 평균 스피드는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145km 전후였다.

1982년 최고 스피드 149km에 근접한 148km까지 측정된 이 경기는 당일 스포츠 뉴스, 그리고 다음날 스포츠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렇다면 고교/대학/실업야구에서의 혹사로 한 물 갔다던 최동원의 KBO 시절 스피드는 어느 정도였을까?

KBO 중계방송에서 스피드건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1985년 스포츠서울이 창간된 이후부터이다. 당시에 스포츠서울은 관중수와 투수들의 스피드를 소개하면서 야구팬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이는 중계방송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85년 후기리그 잠실야구장에서 스피드건 서비스를 본 기억이 있다. [롯데-청용]전이었고 최동원의 스피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최동원이 결정구로 던진 역회전볼이었다. 140km가 찍혔고 최고 스피드도 145km 정도에 불과했다.

전성기 시절의 최동원은 145km에서 형성되는 역회전볼을 언제든지 던질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140km는 충격적인 스피드였다. 물론 현재의 프레임 계산 방식의 스피드건과 당시의 레이저 방식의 스피드건은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2k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므로 실망스런 스피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사실관계가 있다. 최동원은 선수생명이 끝날 정도의 혹사를 3번이나 경험했고, 이전 시즌인 1984년은 그 중 3번째 혹사였다.



그렇다면 막장팀 롯데를 원맨쇼로 우승시킨 1984년의 최동원 스피드는 어느 정도였을까?

1984년은 스피드건 서비스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가장 강력한 공을 던진 1978년과 전성기의 절정이었다는 1981년은 추정할 수 있는 내/외신이라도 있지만 1984년은 그런 것도 없다.

그러나 현재의 미디어 기술은 그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프레임 계산 방식이기 때문에 영상만 확보하면 가능했던 것이다.


2-스트라이크 이후에 던진 결정구 스피드를 측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타자는 홈팀 유니폼의 삼성 타자이고, 최동원은 원정팀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올스타전에서 롯데와 삼성은 같은 팀이므로 최동원의 스피드를 측정한 경기는 한국시리즈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잠실야구장에서 홈팀 삼성과 원정팀 롯데가 대결할 수 있는 경기는 1984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경악할만한 내막이 감추어져 있다. 홈팀이 삼성이고 원정팀이 롯데라는 것은 한국시리즈 5차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동원은 일반적인 야구 상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1차전 9이닝 (2일 휴식) 3차전 9이닝 (2일 휴식) 5차전 8이닝 바로 이 경기에서의 투구를 측정했다는 것이다.

21세기 KBO의 강속구 투수들이 5일 휴식 등판을 해야 가능한 스피드가 최동원은 2일 휴식 등판에서도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동원은 전성기 시절인 1978~1981년, 5년동안 (세계 메이저 야구대회에서 조차도) 3일 휴식 등판이 사실상 없다. 어깨 부상에서 회복한 1984년 후기리그에서도 3일 휴식 등판은 찾기가 힘들다. 한국시리즈에서도 3일 휴식 등판은 없다.

<참고> 박찬호보다 극적이었던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


과거에 사용된 구형 스피드건과 신형 스피드건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신형 스피드건 또한 21세기에 사용되는 프레임 계산 방식의 스피드건과 비교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21세기에 사용되는 스피드건으로 박철순과 에가와 스구루의 최고 스피드를 측정하면 150km를 상회하는, 최동원은 160km에 근접하는 스피드가 찍혔을 것이다.

무개념 일빠대장 야무영웅이 걸핏하면 지껄이는 박동희 등장 이전에 한국 야구에 150km 스피드가 없었다는, 심지어 이상훈, 정민태, 정민철의 스피드가 허접했다는 주장이 그래서 개소리인 것이다.

"80년대 KBO 타자들은 140km만 넘으면 한 가운데 들어와도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했다." 무개념 일빠대장 야무영웅이 80년대 KBO 관련하여 왜곡한 대표적인 혹세무민 사례이다.


김성한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시 한양대에 150km 이상 던지는 피칭머신이 있었는데, 최동원을 공략하기 위해 연세대 경기를 앞 두고 한양대에 가서 그렇게 훈련을 했어도 최동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박찬호 국내 (두산전)데뷔전에서 해설을 했던 마해영도 언급한 바 있듯이, "박찬호 선수를 처음 상대한 건 대학때이다.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강속구였다. 하지만 나는 잘 친 편이다. 박찬호 선수가 대학때 기록은 좋은 편은 아니다."

투수에게 스피드는 전부가 아니다.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완성도이기 때문이다.

<참고> 류현진이 경험한 쿠바와 조계현이 경험한 쿠바는 이만큼 다르다.




빌 제임스와 세이버매트릭스 - 숫자놀음, 방어율(ERA), FIP 야생야사


바둑에는 정석이 있다. 물론 정석을 몰라도 바둑을 둘 수는 있다. 하지만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다.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알고리즘이 그것이다.

알고리즘을 모르면 프로그래머가 될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4세대 언어가 등장한 이후에 알고리즘을 몰라도 프로그래머 행세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성형기술의 발달로 미인들이, 약물(스테로이드)의 발달로 스포츠 우월자들이 대량 양산된 것과 동일하다.

<참고> 아시아 야구사 역대 최고 스테로이드맨 노모히데오


2.18 × N × log(N) + 12.85

위의 공식을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터넷 양아치들에게는 대단하게 보인다. 그 이유가 있다.

지능과 운동능력은 인간의 우월함을 상징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지능과 운동능력이 우월해 보이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다. 수학은 논리의 기본이며, 논리가 뛰어난 사람은 지능이 뛰어날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면 그럴듯해 보이는 공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능이 뛰어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까?

사실은 허영심이 만든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허영심은 희대의 상병신 빌 제임스를 우월한 인간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2.18 × N × log(N) + 12.85

위의 공식처럼 알고리즘에는 상수가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상수를 "변수에 의해 검증된 숫자"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믿고 사용해도 되는 숫자라는 뜻이다. 황금비율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렇다면 투수의 기량을 측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ERA, FIP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ERA] 자책점 × 9 ÷ 이닝
[FIP]  HR x 13 + (BB + HBP - IBB) x 3 - K x 2) / IP + 리그에 따라 변동하는 수치


ERA에 사용되는 상수 9와 FIP에 사용되는 상수 13, 3, 2는 과연 변수에 의해 검증된, 믿고 사용해도 되는 확실한 숫자인가?


타율과 방어율은 비슷한 비율 기록인 것 같지만 천지차이다. 타율은 결과 비율이지만 방어율은 가상 비율이다. 그렇다면 승/패를 구별하는 야구에서 가상 비율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한다는 것인데, 그런 미친 짓이 세상에 어디있나?

야구에 사용되는 공식은 공식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수준이다. 미천한 난이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 양아치들이 야구의 숫자놀음을 경험하는 순간 지능을 가늠하는 척도로 둔갑하게 된다. 그런데 웃기는 건, 공식에 사용되는 상수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85년 김시진 - 47경기 25승 5패 10세이브 269.2이닝 (2.00)
86년 선동열 - 39경기 24승 6패   6세이브 262.2이닝 (0.99)


85년 김시진과 86년 선동열은 최강팀 에이스였고, 방어율을 제외하고는 모든 기록에서 김시진이 우위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숫자놀음으로는 86년 선동열이 85년 김시진보다 압도적인 투수로 나온다고 한다.

복잡하게 따질 필요 없이 숫자놀음에 사용되는 상수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숫자놀음은 개수작으로 정의해야 한다!


백남준은 이런 말을 했다. "예술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예술처럼 추상적 또는 애매한 분야는 사기치기가 용이하다. 야구판의 숫자놀음도 마찬가지다. 희대의 상병신 빌 제임스와 세이버매트리션이라 불리는 인터넷 양아치들의 개수작은 지적 열등감과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명 불가능한 상수가 사용되는 논리는 존재할 수가 없다. 즉 야구판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숫자놀음이 사기극인 것이다.


[ 방어율은 경험적 기록이며 식별자 용도 ]

85년 김시진 - 47경기 25승 5패 10세이브 269.2이닝 (2.00)
86년 선동열 - 39경기 24승 6패   6세이브 262.2이닝 (0.99)


김시진, 선동열의 기록이 동일 시즌 기록이라고 가정을 하자. 그리고 사이영상 수상자를 결정한다면 누가 적합할까?

방어율을 제외한 주요 기록에서 김시진이 선동열보다 우위지만 큰 격차를 보이는 항목은 사실상 없다. 하지만 방어율은 선동열이 김시진보다 월등히 좋기 때문에 선동열이 적합할 것이다. 즉 방어율이 식별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MVP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 MVP는 가장 가치있는 활약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김시진이 무려 47경기에 등판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야구에서 최고의 가치는 이기는 것이다. 김시진은 선동열에 비해 무려 8경기나 많이 등판했고 1승이, 그리고 4세이브가 더 많다. 당연히 MVP는 김시진이 적합할 것이다.


이번에는 방어율이 경험적 기록인 이유를 알아보자.

미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방어율 공식에 사용되는 상수(9)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미인의 기준처럼 애매하다. 결국 시대에 따라 경험을 토대로 방어율의 가치를 해석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선발투수의 경우에는 3점대 방어율까지, 불펜투수의 경우에는 2점대 방어율까지는 사실상 동일하게 평가해야 한다. 실제로 1점대 방어율의 선발투수와 3점대 방어율의 선발투수가 진검승부를 하는 포스트시즌에서 맞대결을 하게 되면, 단순히 방어율로는 그 어떤 전문가도 결과를 장담하기 힘들다. 예상도 불가능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에이스의 덕목은 로테이션과 이닝이팅이다. 특히 로테이션은 방어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야구팬들이 로테이션이 방어율에 끼치는 영향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 실험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다.

3시간 정도 걸리는 등산 코스를 물색한 다음 [4일 휴식 - 1일 등산]의 로테이션을 8번 반복하면 어떤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4일의 휴식기간 동안 컨디션 조절을 아무리 잘 해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날 수도 있고, 예정에 없던 사람들을 만나서 어떤 자리에 참석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컨디션 조절이 그래서 힘든 것이다. 프로스포츠 선수들에게 사생활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어쨌든 패턴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8번의 로테이션에서 컨디션이 좋은 날은 최대 4번, 그리고 2번은 컨디션이 나쁘고 나머지 2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실력있는 에이스는 컨디션이 좋은 4번 중에서 3승, 그리고 나머지 4번 중에서 1승을 거둘 수 있는데, 이러한 패턴이 정규시즌에서 4번 반복되기 때문에 약 15승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소속팀 전력이 좋고 타선 지원을 잘 받으면, 즉 운이 좋은 시즌에는 20승 이상도 가능하겠지만, 반대로 불운한 시즌에는 10승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15승을 기준으로 (+/-)5승은 순전히 운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어율에는 다음과 같은 영향을 끼친다.

완성도가 높은 투수의 경우에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2경기에서도 실점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컨디션이 나쁜 날의 많은 실점은 완성도가 높은 투수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단, 실점이 많아도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는 있다. 그래서 투수의 완성도가 중요한 것이다.

결국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에이스는 어떤 리그가 되었든 방어율 관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컨디션이 나쁜 날의 많은 실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그 최고의 에이스가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200이닝 이상 던졌을 경우에 방어율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아무리 뛰어난 에이스라도 1점대 방어율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기껏해야 5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50% 등판에서, 그 중에서도 컨디션이 나쁜 25% 등판에서 방어율을 까먹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컨디션이 나쁜 25%를 생략하면 어떻게 될까?

방어율을 최소한 50% 이상 내릴 수 있다. 해당되는 대표적인 투수가 선동열이다. 컨디션 나쁜 날의 등판을 피할 수만 있다면 방어율 관리에 유리하다. 그런 등판이 어떻게 가능했는지가 의문일 뿐이다.


그렇다면 로테이션을 지키지 않고 무차별 등판을 하면 어떻게 될까?

방어율은 최소한 50% 이상 상승한다. 로테이션을 무시하는 등판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컨디션 나쁜 날은 피해서 등판하는 방법과 컨디션과 상관없이 무차별 등판하는 방법이 있다. 둘 다 로테이션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최소한 50% 이상의 방어율 하락과 상승의 차이가 발생한다. 2.0 방어율이 가능한 투수가 1.0이 될 수도 있고 3.0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전자는 선동열(1.20)이고 후자는 최동원(2.46)이다.

그런데 최동원의 경우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부상에서 회복된 84 ~ 86년동안의 등판은 인간이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와 비교해서 정규시즌 일정이 평균적으로 20일 정도 짧았고 3년동안의 총 경기수는 318경기였다.

최동원은 롯데가 치룬 318경기 중에서 무려 41.5%를 등판했고(132경기), 776.2이닝을 던졌다(한국시리즈 40이닝까지 포함하면 816.2이닝). 3년연속 기간동안 엽기적인 등판을 하고 2.40/1.92/1.55 방어율은 불가능하다. 관련하여 선동열은 하일성과의 인터뷰에서 최동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주간야구 1988년 9월 14일 발행).

하일성: 일본 프로야구에 가면 몇 승이나 할 것 같으냐?
선동열: 10승은 자신 있고요. 그 다음은 잘 모르겠어요. 86년에 한큐의 카지모토씨가 왔을 때 10승은 너끈히 할 거라고 하대요.

하일성: 미국에 가면?
선동열: 메이저리그는 꿈도 못 꾸고 트리플에이(AAA)쯤에서 뛰겠죠.
..........

하일성: 언제까지 지금같이 던질 수 있을 것 같으냐?
선동열: 3년쯤은 던지겠죠. 그런 것 보면 동원이 형은 굉장한 투수에요. 앞으로 그런 투수는 태어나기 힘들 거에요.


만약 선동열이 최동원처럼 등판했다면?

등판 자체가 불가능하다. 억지로라도 등판할 경우에는 두 자릿수 방어율 확정이라고 보면 된다. 1.20이 아니라 12.0이라는 뜻이다.

<참고> 선동열에게 사용되는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는 정당한가?


진지한 경험과 고뇌만이 방어율 기록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을 시도하지도 않았고, 시도할 생각도 없는 인터넷 양아치들이 함부로 거론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닌 것이다.

방어율은 (가상)비율 기록이다.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 야구에서 방어율이 중요한 기록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방치할 경우에는 가짜 에이스들이 양산될 것이며,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기꾼(세이버매트리션)들이 활개를 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방어율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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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도핑테스트 양성반응과 구로다 히로키의 경이로운 진화


2009년 5월 마해영의 회고록(야구본색)은 파문을 일으켰다. KBO 선수들의 약물복용을 다룬 내용이 있었고, 이 때문에 마해영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마해영을 변호해주기 위해 야구인 출신 기자가 쓴 기사는 또 다른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박찬호의 도핑테스트 양성반응이 감기약 때문이었다고 일단락되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약물시대에 전성기를 보낸, 그리고 100개가 넘는 투구수에도 155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졌던 세기의 우월자 박찬호가 약물복용을 했을리 없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7~80년대 메이저리그는 약물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일명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이 소용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한 미국이라도 임상실험 한계가 있었고, 복용후에 열량을 전부 소비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는 적합한 약물이 아니었다.

선발투수 비중이 컸던, 그리고 이기는 야구를 했던 7~80년대 메이저리그는 치열했다. 타자들은 피로도 경감과 집중력에 효과가 좋은 암페타민, 투수들은 내구력을 지속시키는데 효과가 좋은 에페드린을 주로 사용했다(이닝이팅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80년대 KBO 투수들도 에페드린에 접근할 수 있었을까?


80년대는 세상에 장벽이 존재했고, 군사정권이었던 한국은 장벽이 더 높았다. 현재까지도 KBO에서 에페드린이 사용되었다는 정황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국만큼 마약류 제한이 많은 국가도 드물기 때문이며, 세계화 이후에도 그런 정책은 유지되었다.


한국 정부가 마약에 대해서 유난히 엄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 한국 사회는 마약 문제가 심각했고 성병 환자가 넘쳐났었다. 그리고 이런 문란한 풍토는 516혁명 이후에나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마약류 약물인 에페드린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어도, 일명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선진국 캐나다가 이 정도였다.
냉전시대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었고, 군사정권이었던 한국은 훨씬 엄격했다. 심지어 양담배(외국 담배) 흡연도 불법이었다.


그렇다면 일명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은 언제 한국에 들어왔을까? 그리고 KBO 선수들은 언제부터 약물을 사용했을까?


1985년부터 냉전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울어지면서 세계적인 석학들은 "공산주의는 끝났다"고 예언했고 1986년부터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1986년 양담배(외국 담배)를 시작으로 1987년부터 일명 스테로이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이론적으로는 KBO 선수들이 스테로이드 효과를 처음으로 경험한 시점은 1988년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관계에 대해 무지한 인터넷 양아치들은 최동원의 약물복용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최동원의 경이로운 연투 능력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메이저리그 계약이 아닌 스플릿 계약이었다는 허위사실 유포도 부족해서 약물 타령까지 했던 것이다.

<참고> 최동원 메이저리그 계약서 - 김형준의 어설픈 해석



기반 지식을 갖추었으니 (박찬호) 도핑테스트 양성반응의 진실을 알아보자!


이런 내용이다. 박재홍과 최원호는 스테로이드(진통제), 박찬호는 에페드린(감기약)이 문제였고, 감기약을 조제한 대학병원에 문의해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것이다. 관련하여 소설같은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제주 합숙훈련 캠프서 추운 날씨 탓에 코감기에 걸렸던 박찬호는 감기약을 먹은 적이 있다. 대한야구협회 김병우전무는 "4강이 결정되기 전 대회조직위원회에 약성분의 내역을 밝히는 증빙서를 첨부해 자료를 제출하면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협회차원에서 급히 본국에 연락해 자료를 부탁해놨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관계는 완전히 다르다.

도핑검사시에 최근 복용한 약물을 기재하거나, 의사의 진단서를 첨부하였다고 해서 절대로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료는 검사실 분석과정이나 청문회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는 있지만, 도핑방지규정에 규정된 소정의 절차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면책을 주장할 수 없다. 부상이나 질병 치료를 위해 불가피하게 금지약물 사용이 필요한 경우에는 치료목적사용면책 또는 소급 치료목적사용면책을 승인받아야 비정상분석결과에 대한 책임을 면제 받을 수 있다.

소설같은 기사가 왜 나왔을까? 어쨌거나 박찬호가 감기약을 복용한 시점을 알아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 14일부터 17일간, 즉 11월 30일까지 제주도에서 합숙훈련을 했고, 그 기간동안에 박찬호가 감기약을 먹었다는 것이다.


"26일 자체 청백전때는 최고 148km까지 올라갔다" 늦어도 25일에는 회복되었고, 더 이상 감기약을 먹지 않았다고 봐야 하며, 도핑테스트를 최초 보도한 기사의 날짜가 12월 10일이므로 최소로 계산해도 2주일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감기약에는 에페드린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도핑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박찬호의 경우에는 양성반응이 나올 수가 없다. 관련하여 도핑테스트 안내서에서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감기치료제들은 에페드린류를 포함하고, 이러한 물질들의 과다한 복용은 금지된다. 이러한 약물들은 "경기전 48시간 내에 중단"하여야 하고 허가된 처방약물로 대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자체조사 결과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어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그리고 마해영을 변호해주기 위해 야구인 출신 기자가 쓴 기사 내용중에, "자체적으로 검사한 결과 2명의 선수가 양성반응을 보여 메달이 박탈되지 않느냐는 우려가 나오며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추측이지만, (박찬호가 도핑테스트에 선정될 것에 대비한) 감기약 때문이었다는 여론조장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제주 합숙훈련 캠프서 추운 날씨 탓에 코감기에 걸렸던 박찬호는 감기약을 먹은 적이 있다. 대한야구협회 김병우전무는 "4강이 결정되기 전 대회조직위원회에 약성분의 내역을 밝히는 증빙서를 첨부해 자료를 제출하면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협회차원에서 급히 본국에 연락해 자료를 부탁해놨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시안게임 직전에 청와대에서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은 국가적인 영웅(?)이었기 때문에 만약에라도 박찬호가 도핑테스트에 선정되었다면 심각한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만 23세 투수의 내구력 한계가 뚜렷할 때, 문제점을 해결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일반 야구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해결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 박찬호 전성기 메이저리그 커리어는 약물시대의 위대한 업적?


인간도 엄연히 짐승이며, 짐승의 일생은 환경에 따른 패턴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스포츠에서 특정 선수가 패턴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외부 변수가 개입되었다는 명백한 정황이며, 외부 변수는 99% 약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는 꼭 금지약물이 아니더라도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수많은 보조제가 개발되어 있지만, 21세기초까지만 해도 외부 변수는 99% 약물을 의미했고, 이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박찬호의 경우(내구력 문제)처럼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약물 개입의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핑테스트가 유명무실했다는 허점이 있었다.

도핑테스트가 강화된 현재는 비시즌 기간동안 약물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러한 신개념 조작의 대표적인 수혜자가 바로 "구로다 히로키"이다.





구로다 히로키의 만 30~32세(2005~2007년) NPB시절 탈삼진 하이라이트 영상이며, 패스트볼은 145~146km에서, 스플리터와 싱커는 140km 이하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정구 스피드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패스트볼 최고 스피드는 150km).

만 33~37세(2008~2012년)의 구로다 히로키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전성기 시절을 능가하는 진화를 했던 것이다. 스피드(평속) 데이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구로다는 "구라다"로 진화했던 것이다!

[2008년] 패스트볼 92.0마일 - 슬라이더 83.7마일 - 스플리터 87.2마일
[2009년] 패스트볼 92.5마일 - 슬라이더 84.4마일 - 스플리터 87.4마일
[2010년] 패스트볼 92.3마일 - 슬라이더 84.1마일 - 스플리터 87.3마일 - 싱커 91.7마일
[2011년] 패스트볼 92.0마일 - 슬라이더 84.3마일 - 스플리터 87.1마일 - 싱커 91.9마일
[2012년] 패스트볼 91.8마일 - 슬라이더 83.8마일 - 스플리터 86.4마일 - 싱커 92.0마일


이를 인터넷 양아치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구로다 히로키는 메이저리그에서 진화했으며, 현 아시아 최고 투수"


사실, 에페드린은 80년대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에서는 약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심각한 부작용이 없었다. 대부분의 투수들이 내구력 문제점을 에페드린으로 해결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화한다거나 우월자로 둔갑할 수 있는 묘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90년대부터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에 냉전의 균형이 기울어지면서 공산권의 경이로운 약물 기술이 전세계에 전파되었고, 그 여파로 스포츠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구로다 히로키 따위는 감히 들이댈 수도 없는, 아시아 야구사에서 비슷한 사례도 존재하지 않는 선구자적인 영웅이 존재했으니, 그가 바로 일명 "호모좆데오"라 불리는 "노모히데오"이다!

<참고> 아시아 야구사 역대 최고 이무기 - 노모히데오(야무영웅)


이무기가 용이 되는 해괴망측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져도 의심하지 않는 순수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 우월자들과 절세미인(여신)들이 대량 양산되는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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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특급 박찬호와 토네이도 개척자 노모히데오(야무영웅)


북미 선진국은 70년대부터 미디어 시대가 시작되었고, 일본도 70년대 특정 시점부터는 미디어 시대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80년대 일본에서 유학했던 사람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은 거리에서 미인을 본다는 게 하늘에 별 따기다. 하지만 한국은 거리에서도 미인을 볼 수 있다."

일본은 미디어 시대가 일찍 시작되었기 때문에 왠만한 미인은 TV에서만 볼 수 있었던 반면에 성형기술이 발달한 이후에 미디어 시대가 시작된 한국은 거리에서도 미인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미디어 시대는 성형기술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극소수의 미인들이 독점하던 시대를 종식시킨 것이다.


90년대 어떤 여자 연예인이 등장했는데,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인기가 절정에 오르자 잡다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성형전 사진이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못 생긴 다른 여자들도 성형을 하면 그 연예인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성형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연예인이 성형하지 않았어도 타인이 보기에 성공적인 인생이 되었을까? 이 또한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사실은 성공한 성형 미인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도록 말장난을 한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이 문제점을 다룬 장면이 나온다. 기계와 싸우는 지긋지긋한 현실에 지친 나머지 동료들을 배신했고, 그 대가로 돈 많은 부자에 미인들을 거느리는 가상 인생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재색"을 모두 갖추었다는 표현이 있다. 재능과 미모를 모두 갖추었다는 뜻이다.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엔터테이너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다. 혐오스러운 외모 때문이었다. 재는 뛰어났지만 색이 부족했던 것이다. 재는 열정과 노력으로 완성시킬 수 있지만 색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미묘해서 약간의 수정만으로도 혐오스러운 얼굴을 매력적인 얼굴로 둔갑시킬 수 있는데, 과학의 발달은 그것을 구현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포츠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야구에서 최고 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완성도와 구위를 갖추어야 한다. 완성도는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구위, 즉 파워는 한계가 있다. 일명 약물은 후천적으로 파워를 갖출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삼국지의 유명한 일화를 통해 약물로 파워를 갖추는 과정을 알아보자.

유비는 나이 50이 다 되도록 이룬 것이 없었다. 전쟁에서는 필패였고 근거지도 없었다.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하던 중, 후계자 다툼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표의 처남 채모는 연회에서 유비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비는 도망을 갔으나 어떤 강 앞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급한 마음에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치자 말이 갑자기 뛰어 올라 계곡을 뛰어넘게 된다.

유비가 뛰어넘은 강의 계곡이 바로 단계이며, 유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원직을 만나 처음으로 승리를 경험했고, 이후에 제갈공명을 만나면서 마침내 촉나라 황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유비, 단계에 오르다" 일화이다.


일명 약물은 단계에 오르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성형과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유비가 죽음 직전에 단계를 뛰어넘은 것처럼 강도 높은 트레이닝이 병행되어야 한다.

약물은 무조건 먹기만 한다고 파워를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형과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성형기술의 발달로 미인이 80년대에 비해 90년대는 10배, 21세기에는 20배 이상 증가했다면 강속구 투수는 2배, 3배 정도가 증가했을 뿐이다.

하지만 약물은 양민으로 태어난 소시민에게도 희망을 주었다. (미성년자때 혹사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천재보다 앞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양민으로 태어난 소시민은 과학의 축복으로 마침내 개척자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시대 초창기에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아마도 포르노 사이트일 것이다. 88올림픽 이후에 본격적으로 미디어 시대가 시작되면서 가장 심각했던 문제도 포르노 비디오였다.

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하는데, 청소년의 고민 상담을 해 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고 인기 개그맨이 진행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밤 시간에 청소년의 고민을 전문가가 상담해주는 프로그램이었고, 고교 1학생이 전화를 걸었는데,

선생님에게 들은 말에, "너희들은 물건도 어른처럼 다 컸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들과 포르노를 봤는데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는 것이었다. 고교 1학년생 입장에서 보통 걱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동물 학자들, 예를 들어 사자 전문가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길래 전문가라고 하는 것일까?

사자 일생의 패턴을 알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아프리카 사자와 인도 사자는 패턴이 조금 다르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짐승의 일생은 환경에 따른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사람도 짐승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리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숫사자의 생식기가 완성되는 시점이 되면 어미 암사자가 내쫓는다. 무리를 이끄는 아비 숫사자가 물어 죽이기 때문이다.

쫓겨난 청소년 숫사자들은 보통 2마리가 쌍을 이루어 생사를 건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숫사자들이 죽으며, 여정을 무사히 마친, 즉 내성과 경험을 축적한 어른 숫사자들만이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야생의 맹수들 세계를 인간 세상에 옮겨놓은 것이 바로 스포츠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분야들 중에서 스포츠만큼 원초적인 분야가 없다. 그 옛날 낭만파 주먹들의 패턴도 맹수들 세계와 동일하다. 생식기가 완성되는 시기에 원초적인 잠재력이 드러난다. 빠르면 만 12세부터, 아무리 늦어도 만 17세부터는 잠재력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만 18세부터는 경험과 내성을 축적하게 된다.


이것을 야구의 투수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박찬호처럼 만 12세때 강속구 투수의 자질이 드러나는 천재형 강견이 있고, 선동열처럼 만 17세때 강속구 투수의 자질이 드러나는 대기만성형 강견이 있다(선동열의 실제 생년은 1962년).

결론적으로 만 12 ~ 17세 사이에 강견의 잠재력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패턴이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90년대 들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조작된 음식이 대량 유통되면서 기존의 패턴이 바뀌게 되는데,

(일본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에 비해 조금 더 빠를 수도 있지만) 대략적으로 1980년 이전 출생자와 이후 출생자의 패턴은 다르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 만 15세 전후에 생식기가 완성되지만 신체의 다른 부위는 만 17세까지도 성장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만 18세 전에는 왠만하면 음주를 해서는 안 된다. 부작용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스테로이드는 훨씬 위험하다. 중남미 출신들, 그리고 미국 히스패닉 이민자들은 선수층 대비 강속구 투수와 슬러거들이 비정상적으로 배출되고 있는데, 어린 나이때부터 금지약물을 먹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난한 선수들이고, 인디오 문화 영향 때문인지 대가족 문화에서 빠른 성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장기에 조작된 음식을 먹지 않았을 1980년 이전 출생자(투수)들은 만 12 ~ 17세때 강견의 자질이 드러나며, 빠른 성장이 완료된 만 18세 이후에 강견이 되었다면 약물 복용을 의심해야 한다.

공산권의 경이로운 약물기술이 전파되기 전에는 강속구 투수들이 극소수였다. 성형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미인들이 극소수였던 원리와 동일하다. 조작된 음식이 대량 유통된 90년대 이후에도 강속구 투수들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의 축복은 강속구 투수들을 증가시켰지만 부작용도 컸다. 조작된 음식과 과학의 축복은 강속구 투수들을 증가시켰지만 내성을 약화시켰고 내구력을 형편없게 떨어뜨리면서 현대 야구의 투수들 완성도가 대부분 저질인 원인이 되었다.

이를 인터넷 양아치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타자들 수준이 높아져서 투수들 내구력이 떨어져 보이는 것이다."


KBO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견의 잠재력이 있는 고교야구 투수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완성도 높은 투수들에게만 관심을 가졌으나 21세기부터는 두메산골 출신이 아닌 이상 놓치는 경우가 사실상 없다. 완성도는 노력으로 갖출 수 있지만 강속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약 많이 먹고 트레이닝 열심히 해서 강견이 되라고 독려할 수는 없으니깐!

그렇다면 KBO보다 훨씬 오랜 역사의, 그리고 70년대 이미 북중미 용병들이 있었던 NPB는 어땠을까?

1976년 세계야구선수권은 최초의 세계 메이저 야구대회이다. 그리고 1984년 올림픽에서 야구가 시범 경기로 채택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이 참가한 세계 메이저 야구대회는 다음과 같다.

1976년 세계야구선수권
1978년 세계야구선수권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
1981년 대륙간컵 (1979년까지는 주최국의 초청 형식이었기 때문에 메이저 대회로 보기 힘들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1984년 LA올림픽
1984년 세계야구선수권

1984년까지 세계 메이저 야구대회에서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은 기교파 일색이었고, 1985 ~ 1987년 대회는 확인을 못했지만 1987년에 있었던 대만 초청 대회에서도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은 기교파 일색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과 관련하여 이 말은 상식이었다. "강속구는 아니지만 변화구가 예리하고 제구력이 좋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일본인들은 꼼꼼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야구는 국기이며 70년대에 이미 NPB 역사가 3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강속구 투수의 잠재력이 있는 고교야구 투수들을 놓칠 수가 없다. 하지만 강속구 투수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한국인이든 대만인이든, 강속구 투수는 아무리 완성도가 형편없어도 스카웃을 시도했다. 계형철은 30세에 투구에 눈을 떳을 정도로 완성도가 바닥이었는데, 당시에 아시아 정상급 수준의 강속구를 던졌다고 한다.

70년대 이미 NPB가 선진화된 리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66년에도 이 정도였다.


"만 18세"였던 이원국이 NPB 에이스급 스피드였다는, 그리고 NPB는 강속구 투수 스카웃에 국적과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은 기교파 일색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학야구에 강속구 투수가 존재한 적이 있었으나, 대표팀에는 선발되지 않았다. 본인이 프로를 기피한 에가와 스구루가 있었다.

<참고> 에가와가 최동원에 비교될 수 있는 레벨인가?


아시아 야구에 언제부터 금지약물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패턴을 분석하여 추정하는 방법이 유일하지만, 그 방법은 의외로 정확하다. 왜냐하면 인간도 짐승이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른 패턴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패턴의 범위에는 이런 것이 있다. 만 26세 이후의 투수들, 특히 30세 전후에 팔꿈치에 이상이 생기면 스포츠 의학 전문의들은 왠만하면 재활을 권유하는데, 재생 능력이 떨어지는 만 26세부터는 수술 이후에 다시 구위를 회복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투수들에서 관련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성장기 때는 구위 회복 가능성이 대단히 높지만, 만 26세 이후의 투수들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패턴을 벗어나는 투수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패턴에 변화가 일어난 최초 시점 당시에는 인지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패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역추적하여 대략적인 최초 시점을 파악할 수 있다. 88올림픽 당시에는 몰랐으나 시간이 지난 이후에 경악할만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만 19세"인 애보트가 1987년부터 88올림픽 미국 대표팀 에이스로 예상되었고, 주니치의 신인 투수 곤도(만 18세)가 데뷰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으며 초구 스피드가 144km였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87년 8월까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회인 야구의 노모히데오는 88올림픽에서 150km가 넘는 최고 스피드를 기록했으며, 구위도 아시아 정상급이었다. 경악할만한 사건이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 20세"때 대회 최고 스피드가 150km를 넘었고, 아시아 정상급 구위였다는 것은 고교 시절에도 정상급이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투수가 어떻게 사회인 야구 소속일 수 있나? 노모히데오는 두메산골 출신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NPB에서 고교 3학년(만 18세) 노모히데오의 잠재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만 19세" 이후에 파워가 경이로운 수준으로 발전해야만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과거 아시아 야구에는 그런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강속구 투수들이 극소수였기 때문에 뒤늦게라도 강속구 투수의 자질을 보이면 투수로 전향시키던 시절이었고, 이는 한국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지역마다 음주 가능 연령이 조금씩 다른데, 가장 빠른 나이가 만 18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만 18세부터는 거의 다 성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만 20세까지도 성장 속도가 빠른 경우가 있지만, 그건 일반인들만 해당된다.

실제로 군대에서 가장 전투력이 우수한 계급이 상병이라고 하는데, 정상적으로 입대한 경우에는 만 21세 전후의 나이에 해당된다. 현대인들은 노동의 비중이 적고, 일반인들은 운동선수들에 비해 퇴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뿐이다.

투수의 경우에는 가장 성장 속도가 빠른 만 12 ~ 17세 사이에 강견의 잠재력이 드러나며, 과거 아시아 야구에서 이러한 패턴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나이때 노모히데오는 야구 선수가 아니었나? 이 뿐만이 아니다. 만 26세때 어깨부상에서도 비정상적인 패턴이 발견된다. 관련하여 야구기록 안내자 김형준이 편집한 노모히데오 신격화 스토리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데뷔 후 첫 4년간 너무 많은 공을 던진 노모는, 1994년 마침내 어깨에 무리가 왔다. 여기에 1993년에 부임한 스즈키 게이시 감독은 입단 당시 약속을 깨고 노모의 투구폼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 300승을 달성한 스즈키 감독은 노모가 8월에 부상을 당하자 "이제 그는 끝났다"는 발언을 했다.


1994년은 노모히데오가 만 26세였고, 혹사에 의한 부상이라면 구위 회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스즈키 감독의 발언은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이었다. 과학의 축복 이전 세대에게는 불변의 진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모히데오는 불과 몇 개월만에 부상에서 회복되었고, 타구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에 실금이 간 상태에서도 자원 등판하는 투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다! (뼈 밀도가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그게 가능할까?)

어쨌거나 20세기 아시아 야구사에 노모히데오처럼 혜성처럼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 세 가지가 전부다!


첫째, NPB가 부실한 리그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

노모히데오 등장 이전의 일본 대표팀 주력 투수들은 완성도 높은 기교파 일색이었고 이원국, 계형철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NPB는 강속구 투수 스카웃에 국적을 가리지 않았으며, 복수의 프로팀 스카우트들이 고교 3학년생 노모히데오를 관찰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노모히데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둘째, 포크볼은 스테로이드를 불렀다!

야구기록 안내자 김형준이 편집한 노모히데오 신격화 스토리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장무기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후 구양신공을 배운 것처럼, 노모는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간 신일본제철에서 결정적인 '비공'을 손에 넣었다. 감독이 대수롭지 않게 알려준 포크볼 그립이었다. 이 때부터 노모는 포크볼만 파고 또 팠다. 그리고 "포크볼이 완성되자, 사회인야구가 감당할 수 없는 투수"가 됐다. 노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일본 전역에 확실하게 알렸다.

포크볼을 알려준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다.

신일본제철 에이스인 나카가와란 투수에게 포크볼을 배워, 오늘날 자신을 있게 만든 포크볼을 연마해 갔다. "빠른 직구에 낙차 큰 포크볼"을 가미한 그는 승승장구하며 일약 사회인 야구의 최고 투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두 주장의 공통점은 프로입단에 실패한 후 사회인 야구팀에서 포크볼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모히데오가 포크볼에 익숙해졌을 시점은 언제일까? 일반적인 야구 상식을 적용할 수밖에 없는데, 고교 졸업후인 2월에 포크볼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고, 노모히데오가 포크볼에 대단히 능숙했다는 점에서 아무리 늦어도 여름쯤에는 포크볼에 익숙해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다.

노모히데오는 고교 졸업때까지 찌질한 공을 던졌고, 그 때문에 복수의 프로팀으로부터 낙제점을 받았으며, 그 결과 영원히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만 19세에 익힌 포크볼은 큰 도움이 안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체인지업(포크볼)은 강력한 직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특별해도 위력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노모히데오는 돌파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차별화된 포크볼을 완성시켰지만 찌질한 파워가 발목을 잡았고, 그 걸림돌은 노모히데오가 선구자의 길을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공산권의 경이로운 약물기술이 전세계에 퍼지기 시작한 90년대 이후에 체인지업의 비중이 높아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투수가 완성도를 갖추는 과정은 고난의 여정이지만 과학은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과학은 구위와 스피드를 괄목할만하게 향상시켰고 세계 야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경쟁력있는 "포심+체인지업"이면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투수, 타자 할 것 없이 한 방 야구가 대세가 되면서 그야말로 저질 야구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1988년 만 20세의 노모히데오는 사회인 야구를 평정하는데, 강력한 직구와 포크볼이 원동력이었다. 1987년 여름까지도 찌질했던 구위가 1년도 지나지 않아 아시아 정상급 구위가 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무조건 약물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면 확실하다. 인간은 짐승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두 번째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지만 미천한 일빠들에게 노모히데오는 신성한 존재이므로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세째, 노모히데오는 운명적인 영웅이었다!

세 번째 가능성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노모히데오는 "만 19세"부터 시상하부와 뇌하수체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과다 호르몬 분비로 인해 일반적인 우월자들과는 달리 2차 성장을 하면서 강견의 잠재력이 뒤늦게 드러났던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아주 간단하다.

생식기가 2차 성장을 했다는 뜻이다. 생식기가 완성되는 만 15세 전후가 중요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체 성장이 가장 빠른 나이때 인간의 원초적인 잠재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찌질이었던 인간이 빠른 성장이 끝난 이후에 경이로운 잠재력이 드러났다는 것은 생식기가 2차 성장을, 그것도 일반적인 우월자들의 성장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성장을 해야만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노모히데오는 하늘이 낸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호모좆데오였던 것이다!


누구도 정답은 알 수 없지만, 둘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스테로이드 또는 경이로운 2차 성장 외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은 용가리 통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짐승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NPB의 변태성을 지적하는 내용 중에 이런게 있었다(마쓰자카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않았을 때이다).

"어떻게 마쓰자카를 노모히데오보다 더 높게 평가하나?" 사실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주제도 모르는 일그러진 영웅의 "소시민은 도전자를 비웃는다"는 희대의 개소리를 마쓰자카가 깨 주기를 바랬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득이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인들의 운동능력이 저질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노모히데오의 과거는 비루하지만, 아시아 야구의 흐름을 바꾼 선구자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냉전의 균형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80년대 중반에 다시 재개된 미일 올스타전에서 NPB 올스타는 비참한 패배를 당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7차전까지 NPB 올스타는 21득점(평균 3득점), 51안타(평균 7안타)를 기록했다.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국제경기였다는 점에서 결코 적지 않은 안타와 득점이었다(매 경기 7안타 3득점).

문제는 71안타, 19홈런을 허용한 투수력과 고작 1홈런을 기록한 장타력에 있었다. 파워 차이가 상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NPB 에이스들이 메이저리그 4선발 조차도 꿈이었고 땜방 5선발 견적이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었으니 답이 안 나왔다. NPB 최초의 현역 메이저리거 용병이었던 밥 호너는 1987년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는 빠른 볼과 느린 볼이 있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에는 느린 볼과 더 느린 볼이 있다."

이런 흐름을 바꿔 놓은 선구자가 바로 노모히데오이다. 1988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일본인들도 먹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노모히데오가 이끈 NPB 올스타는 4년전의 수모를 그대로 갚아주었던 것이다!

1990년에 수모를 당한 미국은 냉전시대 마지막 엘리트 스포츠 세대들을 주축으로 엔트리를 구성하여 1992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NPB 올스타를 짓밟아 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20세기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저력이었다.


1993년부터 세계화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메이저리그도 변신을 시도한다. "쇼 비즈니즈 엔터테인먼트 서커스 리그"로의 변신(이기는 야구가 아닌 멋있는 야구)에 성공하면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잘 먹는 사람이 튼튼하다는 진리를 증명했던 것이다.

1995년 다저스에 입단한 노모히데오는 6월 3일 메츠전에서 브렛 세이버하겐을 상대로 8이닝 2안타 1실점 승리를 시작으로 7연승을 질주하면서 토네이도 열풍을 일으켰으며, 그 해 28경기에 등판하여 13승 6패로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노모히데오는 동양인도 먹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서양인을 이길 수 있다는, 그리고 아시아 야구도 얼마든지 스케일 큰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개척자였다! 90년대 아시아 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흐름을 바꾼 선구자였다!

<참고> 박찬호 전성기 메이저리그 커리어는 약물시대의 위대한 업적?


어쩌면 과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도 천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진정 우월한 종자라 생각하여 최고라고 믿었다면, 번지수가 틀렸다! 노력과 열정, 그리고 약발을 인정하여 최고라고 생각했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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